산실<産室.Maternityward>크기,가로130.3세로97.0캔버스에유채
수년전에그린유채화인데이그림은옹기공장의제작과정을유심히살펴보던중,흙으로항아리모양을만든후독막
이라는그늘진장소에놓아두고자연건조시키는공정의하나로,어둠속에서바깥에서들어오는빛을받아서은은히
빛나는모습에매료되어사진을찍어와서그린것인데우리조상들의혼이깃들어있는듯한고고한모습을잊을수가
없어서화폭에담아본것이다.
이제는시골장독대도많이사라지고없어서정겨운모습의옹기항아리나그릇들도보기가쉽지않은형편이다.
나의고향집에도옛날기와집을허물고양옥으로신축하는탓에그정겨운모습의장독대는사라지고,꼭필요한
항아리몇개는부엌뒤쪽에두고사용하고있을뿐이어서그전처럼정이가지않는다.
독막에서자연건조를마친후가마로들어가기전의옹기들.
물레위에서독을빚는장인의힘찬모습.
옹기(甕器)는근대·현대의개념으로무유(無釉)또는시유(施釉)를한도기질(陶器質)그릇의총칭.
원래는이와같은질적인구분에의한것이아니라그릇의종류를가리키는것으로저장용큰항아리를말한다.옹(甕)이큰항아리를가리키는최초의자료는경주안압지에서출토된대옹(大甕)에음각된’십구입옹'(十口入瓮)으로,통일신라시대에는도자기를’陶’또는’瓦’로표현했으며’瓮’은그릇의종류를의미했다.이러한표현은고려시대에도그대로사용되었으며조선시대에와서그개념이변했다.〈세종실록〉지리지에는도자기제작소를도기소(陶器所)와자기소(磁器所)로구분한반면,〈경국대전〉에는제작자를와장(瓦匠)과사기장(沙器匠)으로구분하고있다.또옹장을황옹장(黃瓮匠)이라고도표현하고있어조선시대에는’瓮’의개념이사기(磁器質)가아닌옹기(陶器質)를의미하는것으로추측된다.근대에들어오면도자기의생산체계가자기와옹기로양분되면서자기를제외한토기·오지·질그릇·옹기등을통틀어옹기라고한다.옹기는제작방법에서자기와큰차이를보이는데,성형기법은초기철기시대에중국으로부터전래된타날법(打捏法)이며유약을씌우는경우에는잿물[灰釉]을사용한다.가마는전통적인통가마[登窯]이며1번만번조하여완성한다.일제강점기이후자기제작소는외래의기술이들어오면서전통적인기술이사라졌지만옹기의경우는전통이잘보존되어왔다.그러나근래에등장한플라스틱·스테인리스등과같은대체재료에의해그수요가감소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