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지리산을처음올라가본것은고등학교1학년여름방학때였는데반친구3세명이함께가게되었다.
내고향산청(山淸)은이름그대로산으로둘러쌓여진산골짜기동네인지라산과늘함께하였기에,조그만산보다는
큰산구경한번해보고싶은마음에지리산에오르기로하고그야말로꼬맹이들이겁도없이뒷동산소풍가듯이
조그만배낭에운동화신고서등산을하게되었는데,산에가서처음느낀것이우리들의행색이초라함에웃음이먼저
나왔다.전국에서온등산매니아들의화려하고멋있는등산복차림에기가질렸는데..당시우리들꼬락서니는교련복
바지에반팔티셔츠와하얀운동화차림이었다.다들우리를자꾸쳐다보길래처음에는왜그러는지몰랐는데..
한참산을올라가서해가저물어법계사산장에1박하게되었다.다들밥을짓기위해준비하느라장비들을꺼내는데
보니까,장비들도다좋은지라또놀랬는데,수군수군저들이하는이야기를들어보니꼬맹이들이행색은초라해도
산하나는잘탄다는이야기를하고있었다.그래서우리끼리이야기인즉,"야,우리도이담에어른되거든돈많이
벌어서등산복이나등산장비도제일좋은걸로준비해서다시오자"하고다짐했던기억이떠오른다.
산골촌놈들이야늘산과함께하기에등산같은것은대수롭지않게생각했지만,지리산의그거대하고웅장함에
놀란것은그때가처음이었는데,그뒤로도몇번을더종주하고서는최근에는가보지못한산이되었다.
지리산은3개도5개시군을아우르는광활한면적으로이루어진산이다.여가문화의발달로최근에는지리산을찾는등산매니아들이부쩍늘어나서사시사철지리산은산악인들로인산인해를이루고있는곳이기도하다.인터넷문화의발달로지리산을주제로하는홈페이지가전국의유명산홈페이지중가장많은카페나블로그,홈페이지가있기도한다.
최근에와서는그동안꼭꼭숨어있었거나세인들의관심밖에서묻혀있었던지리산관련된여러정보들이나자료들이새롭게발굴되어지고있고,새로운것들이계속해서발견되어지기도한다.
전국에있는유명산중유독이지리산이화려하고빼어난다른산보다도산악매니아들로부터사랑을더욱많이받고있는이유는무엇일까?짐작해보건대지리산은그광활한면적만큼이나다양함과어머니의품같은포근한산세의지형때문이기도하거니와우리의삶을함께한지리산의잠재된역사성과혼이배인때문이기도할것이다.
1967년에우리나라최초로지정된국립공원1호.전북남원시,전남구례군,경남산청군,하동군,함양군의3도5개시군과15개면을접하고있는거대한산군이며1억3천만평의규모를자랑하고둘레의길이가800리에이르는그야말로방대함에기가눌릴정도이다.
지리산이우리에게더중요한것은그규모나생태계,자연경관뿐만아니라우리의역사와함께해온민족의영산이란점이다.단군왕검이래5천년세월을이어오는동안좌절과굴곡의역사에서,우리는지리산능선에기대어통곡도하고,지리산을통해새로운삶과희망을기약하며,때로는지리산자락을부여잡고발버둥치고,피를흘렸던사실이있었다.
지리산은예로부터금강산,한라산과더불어신선이살았다는전설속의삼신산(三神山)의하나로‘방장산’(方丈山)이라일컬어왔다.지리산의또다른이름은‘두류산’(頭流山)으로불리어지기도한데고려왕조를무너뜨린태조이성계가조선을개국하려할때전국의명산에기도를올리며역성혁명의창업의뜻을물었는데유독지리산만이응하지않고소지가오르지않아‘반역산’(反逆山),‘불복산’(不伏山)으로도불리게되었다는얘기도있다.
여순반란에서6·25민족전쟁을거치는동안빨치산활동의근거지가되기도했고이웃에서살던사람들이이데올로기자체의개념도모른채좌와우의소용돌이에말려숱한고초를겪은곳도지리산이요,가장최근까지도혼돈의역사를함께한산이다.
구비구비골짜기를형성하여있고그골짜기의수만큼아기자기한전설또한빼놓지못할고귀한지리산의혼의덩이이기도하다.
지리산에는세세한전설만큼이나산줄기마다사연도많아내딛는발자국마다역사의향기가묻어나며애잔한전설한자락씩품고있다.지리산은마한의피난도성,가락국의멸망,삼국시대를거치면서국경의변방으로늘싸움터의중심이되었다.고려때는왜구의침입과민란으로,조선시대에는임진왜란과정유왜란,동학란으로,해방공간에는여순반란과민족전쟁으로서의싸움터였던것이다.
우리민족의주요고비마다호흡을같이해온지리산.그넓이나높이만큼우리에게큰산.그곳에는조상들의삶의흔적인수많은문화재가널려있으며,죽음과생성의역사가있다.지배와저항의역사가있기에,지배문화와민중의문화가뒤섞여살아숨쉬고있다.또한지리산은높고크기에,보는방향에따라서각기다른모습을보여준다.때로는장엄,험악한아버지의형상으로,따뜻하고포근한어머니의품속으로많은사람들에게느껴져왔기에세월과함께더더욱사랑을받고있는지도모른다.
사진.지도:지리산홈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