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혁당 사건 재심결과를 보고나서

최근법원에서1970년대에발생한인혁당사건의재심결과는모두무죄로판결이났다.

32년전의유죄판결후사형까지집행된사건을재심한결과이다.

2005년12월27일재판부는인혁당사건에대한재심소를받아들였다.2007년1월23일서울중앙지법형사

합의23부는피고인8명의대통령긴급조치위반,국가보안법위반,내란예비·음모,반공법위반혐의에

대해무죄를선고했다

우리한국의근현대사에있어서,

제대로밝혀지지않은크고작은사건.사고들이무수히많은것으로알고있는데,뒤늦게

나마인혁당사건이제대로판결났다고하니다행스런일이라하겠다.

이번판결은,피해자(?)유족들이재심을청구하여재판부에서받아들여무죄를확정한

사건이다.

무죄확정과함께유족들은국가를상대로배상청구도병행했을것인데,배상규모도큰

관심사가될것으로보인다.

앞으로는이와비슷한사례가더나올수도있을것이고’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조사

위원회’라는다소거창한이름의기구에서추진하는과거사바로잡기업무등을고려해

볼때,우리는언제까지과거사캐기에만열중할것인지걱정스런마음이들기도한다.

기왕에과거사를바로잡겠다고하면다음에기술된사건들에대해서도제대로평가가

이루어져야할것이다.

널리알려진가슴아픈사건들이기는하지만,아직제대로된조사나체계있는검증이안된

사건들이다.

이사건관련자들의진정이나사건규명을위한노력이있었지만뚜렸한이유없이묻혀져온사건들인데,

과거사조사위에서규명해줄것을바라고싶다.

또,한가지80년5월에일어난광주사건(광주민주화운동)시에무장시민군에의해사살된

우리국군의명예도분명히회복되어야할것이다.

여순반란사건

전남동부지방(특히여수,순천,광양,구례,곡성)은46년10월의‘추수봉기’기간동안전남의중·서부지방과는달리경찰,지방관리,지주에대한습격이거의나타나지않았다.주된이유중의하나가전남의동부지방경우엔좌익세력과우익세력이긴장,대립관계속에서도공존할수있었던지방정치의특수성에기인한것이다.또한전남동부지방은당시의중앙인광주로부터떨어진지리적위치등으로1946년추수봉기권과는거리를두고있었고,그러한지리적여건과더불어전남동부지방의‘인민위원회’는전반적으로구성인원의과거경력,직업적출신배경,정치적성향이매우다양,복잡하고좌·우익이타지방과는달리공존한상태였다.
1945년8월20일결성된‘여수건준’의경우는위원장이우익계인사였으며군청을접수하지않고진남관에본부를두고업무수행을하였으며,치안대도경찰서에접수하지않고독자적으로운영하고있었다.‘순천건준’의경우는여수건준과는대조적으로좌·우익간의갈등이빈번했던지역이었다.순천건준은좌익측을배제한채우익인사로의해전격적으로결성하였다.이지역은우익세력과좌익세력이만만치않아갈등이빈번하였다.‘광양건준`과`곡성건준`은좌우합작에의해결성되었다.다시정리하자면광양이좌익세력의우세지역이었다면나머지는우익세력이우세하였고좌·우세력의갈등이빈번한지역은순천이었고나머지는평온한공존관계였다.
그러나1948년초까지지속되었던전남동부지방의좌·우익간공존관계도48년봄을기점으로와해되기시작했다.계속되는인플레이션,강제적인미곡공출등으로민중의삶은극도로악화되어가고있었고,동시에‘2·7구국투쟁’과‘5·10선거저지투쟁’따위의소위‘단선단정부반대투쟁’의바람이전국을강타하고있었다.46년추수봉기권에들지않았던전남동부지방에서도단선저지투쟁이확산되어갔다.순천의경우가가장빈번히나타난지역이었다.바로이무렵단선단정부반대투쟁이절정에달했으며동시에춘궁기까지겹치는1948년5월초에여수에14연대가창설되었다.여수제14연대는‘5·10선거저지투쟁’과정에서경찰의추적을받는전남의좌익들과가난에쫓기는실업자들의은신처였으며,물론남로당의당지도부도이들을조직적으로침투시키고있던터였다.이러한부대내의좌익극렬분자들은김지회중위,홍순석중위,지창수상사등을중심으로행동의기회를엿보고있다가때마침제주도폭동의진압을위하여제14연대의1개대대가출동명령을받게되자그준비로부대전체가바쁜틈을이용하여무장폭동을일으키게되었다.

제주4.3사건

남한만의단독정부수립에반대하여제주도에서일어난무장봉기.
폭동이라고불리우는4·3에대한올바른이해를…

1948년4월3일남한만의단독정부수립에반대하여제주도에서일어난무장봉기,바로제주4.3사건이다.미군정초기부터지속되어온인민위원회및대중들과경찰,우익단체간의갈등이무장봉기로폭발하였다.
한라산을근거로하는유격전으로발전,49년까지계속되어이에대한진압작전에나선토벌대는초토화작전을전개,유격대와주민을가리지않고무차별공격,집단학살하여수많은인명이학살당했다.
한사람의죽음도그렇게극진하게장래를치루는법인데,난리를겪으면서염조차못하고매장된경우가부지기수일진데50년가까이구천을맴도는원귀들을달래지않을수는없지않은가?
역사를정립하고국민의아픈상처를치유하는데정치적인계산이있어서는안된다.오직실체적진실의발견과명예회복으로화합차원의대책마련에모두예지를모아야하며어느쪽에위치하였던지간에악몽과도같았던마음으로전환하여아픈역사의앙금을하루빨리걸어낼수있게되는계기가되었으면한다.

용어문제

제주도폭동사건:1948년4월3일남노당의사주아래제주도한라산에서공산무장폭도가봉기한사건(국사대사전,교각도서출판)
제주4.3사건:19484월3일을기해서제주도전역에걸쳐남조선노동당계열의좌익분자들이일으킨대폭동(한국민족문화대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제주4.3은위와같이용어조차정립되지못한채’난리,사태,소요,폭동,반란,의거,봉기,항쟁’등논의가분분하다.어떻게불러야할지는사실을사실대로볼때만이가능할것이다.

4.3의전개과정

4.3이라는숫자는제주도무장대가단선,단정의반대와조국의자주통일,극우세력의탄압에저항한다는기치를내걸고미군정경찰과서북청년단등을향해본격적으로공격을개시했던1948년4월3일을가리킨다.그러나이날의사건은복합적이고누적돼전사(의한기폭점에불과하다.이날이후6년6개월이상계속되사건의진행또한일관적이기보다는그성격과양상을가름하는몇고비중요한별화를보여주고있다.따라서43의총체적인모습을살피기위해서는사건의전개과정을둘러싸고있는시기적특성에주목할필요가있다.

거창양민학살사건(居昌良民虐殺事件)

1951년2월경상남도거창군(居昌郡)신원면(神院面)일대에서있있던양민대량학살사건.6·25당시에지리산을근거지로하여출몰하는공비토벌작전을벌이던국군제11사단제9연대연대장오익균(吳益均)대령,제3대대대대장한동석(韓東錫)소령의작전에의하여감행된것으로,같은해3월29일국회의원신중목(愼重穆)이당시부산에피난중이던국회에서보고함으로써알려지게되었다.이들은대현(大峴)·와룡(臥龍)·내탄(內呑)·중유(中楡)등6개마을주민들이공비와내통한다는이유로2월10일내탄부락골짜기에서청장년136명을,11일에는박산계곡에서다시527명을무차별학살하였다.문제의이작전명령제5호는1951년3월21일자로되어있는것으로내용은,<신원작전에참가하는대대장은이동군법회의설치권한을부여하는동시에현지에서이적행위자로판결되는자는간이재판에의하여현지집행하라>는것이었다.그후국회에서의국방·내무·법무의보고내용이서로다를뿐만아니라정부측이무성의하고핵심을피하는보고에만그치자,국회는특별조사위원회를구성하여현지조사를하기로결정하고,국회조사위원단을파견,정확을기하려하였으나당시헌병부사령관겸경남지구계엄민사부장김종원(金宗元)은공비를가장한군인과경찰을매복시켜조사단에게총격을가함으로써현지조사를저지시켰다.그러나같은해5월8일국회는비합법적행형(行刑)을규탄하는결의안을채택,공개함으로써그부당성을지적하였다.그결과당시내무·법무·국방의3부장관은사임하였고,군법회의에서이사건의직접책임자인김종원·오익균(吳益均)·한동석·이종배에게각각징역형을선고하였으나얼마후모두대통령특사로석방되었다.1960년5월11일4·19의거로자유당정권이무너지자유족70여명이보복책으로당시의면장박영보(朴榮輔)를끌어다생화장하는참사가일어나고대검찰청의재수사로사건의진상이드러나게되었다.
국가의정체성확립차원에서는제대로규명되지않은사건.사고들에
대해서는반드시올바른평가내지는정확한판결이따라야한다는
뜻에서이글을올려봅니다.
자료인용: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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