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당서원 이야기

내고향소재의서원이야기를올려봅니다.

김황(金榥)

시대 항일기,대한민국 생몰년 1896-1978 본관 의성(義城) 자 이회(而晦) 호 중재(重齋) 활동분야 유학자 다른이름 김우림(金佑林)

성장기

1896년(고종33)5월26일에지금의경상남도의령군궁류면어촌리에서태어났다.
5세부터글을배우기시작하여이미신동으로알려지게되었다.
1909년에는의령남씨(宜寧南氏)와결혼하였고,1910년나라가망하자아버지를따라경상남도산청의황매산(黃梅山)서쪽만암(晩巖)이라는깊은산골로이사하여세상을등지고독서에만전심하였다.
당시한주학파(寒洲學派)의주리학(主理學)을대표하던곽종석(郭鍾錫)의문하에들어가수학하면서더욱문명을떨치게되었고,그학통을계승하기에이르렀다.

김황선생

일제저항활동

1919년에는스승의명으로곽윤(郭奫:곽종석의조카)과함께상경하여고종의인산(因山)에참여하였고,여기서김창숙(金昌淑)과만나파리강화회의에파리장서(巴里長書)를보내기로결의하였다.거창에내려와서도스승의명을받들어진주·산청·삼가등지의유림을순방하면서장서의취지를설명하고서명을받았다.김창숙이장서를가지고상해로떠난뒤,왜경에발각되어제1차유림단사건(儒林團事件)이일어나옥고를치렀다.오래지않아병보석으로풀려난뒤스승의상을당하였고,이때24세의젊은나이로상례(喪禮)의중책을능히완수하였다.
1926년에는여러동문과더불어서울에서《면우집#면02宇集》을간행하였는데,그간계속상해에망명중이던김창숙이이소식을듣고독립운동의자금을모집하기위해비밀리에입국하였다.김황은김창숙의은신처로몰래연락하면서《면우집》간행소에서유림조직을이용하여모금운동에적극앞장섰다.김창숙이가지고간거액의자금이뒤에나석주(羅錫疇)의동양척식주식회사투폭(東洋拓殖株式會社投爆)등독립운동에사용되었음이알려져제2차유림단사건이일어나자9개월의옥고를겪었다.
1928년에는만암을떠나산청군신등면내당촌으로이사하여강학(講學)을시작하였는데,이로부터약50년동안1천여명의문도(門徒)를길러냈다.광복이전은물론이고이후에도대학의학생과교수들이방학기에몰려들어내당서사(內塘書舍)는한때전국유림의중심지로일컬어졌다.
일제강점기말에창씨령(創氏令)이내리자이를단호하게거절하였다.자신이끝내보발(保髮)하여전통유림의모습을고수하였음은물론이고,자녀들도식민지교육기관에는보내지않았다.
이리하여일제의압력은물론,일체의비리와무지에굴하지않고끝까지도학(道學)의정통을지키면서만년에이르도록이를널리성심껏후인들에게전수하는데진력하였으며,현대의신지식층에게까지이어지게하여,전통사회와현대사회를연결시키는마지막유종(儒宗)의구실을하였다.
1978년12월에죽자,많은조객이운집하여유월장(踰月葬)으로장사지냈다.

도학정립

그는동서고금의모든학문을광범하고섬세하게섭렵하여한주학파의‘심즉이설(心卽理說)’을기반으로하는도학을정립하였다.〈근서천군전후謹書天君傳後〉·〈동유심학약도東儒心學略圖〉등에서는심설(心說)을중심으로독특한성리학계보도(性理學系譜圖)를만들어이황(李滉)―김우옹―이진상(李震相)―곽종석으로이어지는계보에자신의위치를설정하고심즉이설의학통을지켰다.
성리학적논변에서보인그의입장은심즉이설의개념적분석과논증에따른논리적치밀성에서중요한업적을남겼다.
동시에물리적내지실리적가치가도학의가치규범의우위를차지한시대에살면서,20세기의우리사회가겪은사상사적급류속에서심(心)이공리(功利)에미혹하여심의본체가지닌근원성을확인하지못하는데서오는의리(義理)의상실을경고하며,도덕적주체의자각을정립하기위하여이를실천적으로추구하여도학의정통성을굳건히지켰다는점에서의미를가진다.
저서로는사서삼경등역대경학(經學)에대한《쇄기#쇄07記》·《효경장구孝經章句》,예학(禮學)에관한《사례수용四禮受用》,역사에관한《동사략東史略》·《역년도첩록歷年圖捷錄》·《독립제강獨立提綱》·《환영대조#환04瀛對照》(연표)와방대한시문집인《익붕당총초益朋堂叢#초53》,그리고《일기日記》등이남아있다.

내당서원-경남산청군신등면소재-

참고문헌

三·一運動과儒敎界(許善道,3·1運動紀念論叢,東亞日報社,1961)
續儒學近百年(琴章泰·高光稙,韓國經濟新聞,1985.3.29.)
선비像―金榥先生의印象―(千寬宇,韓國近代史散策,正音文化社,1986).〈許善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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