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늘 여인을 사랑했고 그건 내게 에너지를 줬다”
“다시는정치안하려고난생처음파마했지”

출감한신성일

“나는늘여인을사랑했고그건내게에너지를줬다”

최보식기자congchi@chosun.com


입력:2007.03.3023:00/수정:2007.03.3106:25“출감(出監)다음날곧바로머리를파마했어요.이게‘베토벤’스타일이오.감옥에면회온백건우·윤정희부부가‘베토벤의생애’라는책을넣어주고갔어요.악보나이론쪽은전문적이라그냥넘겼고베토벤의머리모습에는정말끌렸어요.그래서출감하고다음날바로우리엄여사(엄앵란)가애용하는미용실에서‘베토벤’스타일을주문했지요.”

대구시효목동의사무실에서만난신성일(申星一)은어두운감방(監房)이아니라어디볕좋은곳에서휴양하고돌아온양얼굴에화색이돌았다.1937년생이니나이로치면그는칠순노인이다.이제는입에배인“신성일”을정정하고흔한‘원로’나‘선생님’을앞뒤로붙여야겠다고생각했는데,그는물날린청바지차림에다,평생처음해봤다는파마머리나자랑하고있는것이었다.

“아침마다목욕탕거울을들여다볼수록정말마음에들어요.정치인들은짧고단정한머리를합니다.나도그때는그랬지만,이제다시는정치를안할거니파마를한거죠.젊어서도이좋은파마를못해봤어요.눈만뜨면영화를찍어야하는데파마스타일로는출연할수있는영화가없잖소.파마를하고나니이모든구속에서벗어난것같아요.”

#줄서고간빼주고…정치는생리에안맞아

신성일은왜정치를했을까.대구로내려가는열차안에서이런잡념에빠졌다.10년전나는그를인터뷰했다.저멀리떠있던은막(銀幕)스타가국회의원선거에서두번이나낙선한뒤3수(修)를하고있을때였다.“대부분사람들은정치인‘강신성일’보다는영화속에서만나는신성일을원한다”고했을때,그의자존심을건드린것같았다.

“원하는것은그사람들이지….영화배우가무슨정치를하느냐고그러지만,한동안군인들도정치를했어요.이제는민주화투쟁한다고거리에서손만뻗치던친구들이정치를합니다.남모르게공부했는지는모르지요.나는한분야에서삼십년이상확실히했습니다.그런데내게정치자질을문제삼을수있나요.”

그리고10년의세월이흐른뒤나는TV화면에서머리와수염이은백(銀白)이된그를봤다.특별사면으로의정부교도소를나오는장면이었다.“공짜밥잘먹었다.정치는생리에맞지않기때문에앞으로하지않을것이다.식구들을위해조용하게살겠다.”

정치는그에게무엇이었을까.처음만난뒤로10년만의연락이었지만그는기억했다.그는“우리엄여사가기자를만나지말라고했다”고전하면서,나를만났다.

“출감직후‘공짜밥잘먹었다’는말은솔직한심정이었어요.내가대구의아파트에혼자내려와있으면직접밥하고설거지해야하는데,교도소에서는제때밥세끼주지,교도관이화장실에가도따라오지,교통사고날일이없지,책읽고생각할수있지…,어느집엘가도이런보호를못받아요.의정부교도소안에서는‘떠난사람중에는장세동,지금은신성일’이라는말이나올정도로나는수감생활을잘했어요.그리고정치를절대로하지않겠다는것도평소생각이었소.정치는정말생리에맞지않는것이었어요.”

―10년전제게했던답변을기억합니까?

그는“내가그때뭐라고했소?”라고반문한뒤,“당시에는그렇게말할수있었겠지.그쪽세계를몰랐으니까.뛰어들어보니생리적으로맞지않다고깨달을수있는것아니오”라고응수했다.

“누구편에줄서기를하고그래야공천을받으니,정말하기싫었소.삼류짓이었소.‘상생(相生)’정치를자주떠들지만,정치인들3분의2가법률공부를한사람들이라서로잘지내다가자구(字句)하나틀리면원수처럼돌아서버려.세상사는묘리를모르고인격도부족한것이오.상인들은오늘당장좀손해를보더라도내일이득보면되고,서로주고받을줄알아요.그러니자영업이나중소기업을하다가부도를겪고좌절도해보고인생쓴맛도아는사람들이정치하면좋을것같다는생각도들었어요.”

#권력이라는것?아무것도아니었어?

―대중에게는이미선망의대상이었던선생이왜정치에끌렸지요.권력에대한열망이었나요?

“내가영화계스타로있는동안주변에정치인들이많았지요.한때는권력1인자,2인자들과‘형님’하면서가깝게어울리기도했고.그러나나는영화인일뿐이고,그(권력)속에들어가지못하니,뭐랄까,관심과선망이있었지요.영화계에서는나도남자답게살아왔는데,정치인들은뭔가더큰꿈을꾸는장부(丈夫)로보였지요.바로그거요.권력과가깝게있었지만내가가진것은아니었지.그래서뛰어들고싶었던것이지요.하지만국회의원한번한걸로족해요.”

―국회의원이된뒤실제그런힘을맛보기는했겠지요?

“영화배우의인기에다권력의날개를하나더단셈이었는데…,실제로는아무것도아니었어요.오히려과거보다더위축됐어요.정당인으로서의의무를해야하고,간(肝)도다빼주면서지역유권자의기분에맞춰야되고.이건내생리에맞지않은것이었어요.”

#출감때"공짜밥잘먹었다"솔직한심정

―그전에는남의비위를맞추며살필요가없었겠지요.

“요즘송혜교·배용준을보면얼마나이쁩니까.그나이때는나도그랬던것같아요.이후락(李厚洛)실장이부르고박정희대통령의귀여움을받았으니,세상에보이는것없이얼마나우쭐했겠어요.박대통령이참석한경부고속도로개통식행사날에보란듯이‘무스탕’을타고부산까지막달렸을정도였으니.아마내가철없는마누라와살았더라면벌써오래전에내삶이망가졌을거요.엄앵란이는나보다한살위지만사회경험은훨씬더많아‘어디서든제발나서지말라’고나를말리곤했지요.”

그가수감되어있는동안,엄앵란씨는‘남편은일흔의나이로앞으로살날도얼마남지않았다.아직은어렵고힘들더라도,자격이못미치더라도처의처지로,가족으로서감히말씀드리고자한다’며특별사면대상에포함시켜달라는호소문을돌린적이있었다.

그는이비감해야할대목에서도“교도소에서그게유행됐어요.나이든수감자들끼리말을주고받다가‘여보시오,살날도많지않은데뭐그런소리를하시오’라고들했지”라고껄껄거렸다.

#엄앵란의순발력은별난남편만난덕분―젊은날에는한때바람을피워부인을속상하게했고,나이들어서는감옥에갇혀부인을슬프게만들었으니,선생은참으로철없는남편입니다.

“철없는남편이라…”그는말을되씹다가“거부하고싶지는않소”라고했다.

“그러나엄앵란이가방송에서순발력을발휘하고많은주부들에게먹혀드는것은남들보다변화무쌍한별난남편과살았기때문이아닌가요.남편을잘활용하고있는것이지요.이런내가있어엄앵란이존재하는면도있지않아요.하지만이번에출감하고서우리엄여사에게정치를하지않겠다고약속하고,TV프로그램‘6시내고향’에나오는지방곳곳을죽을때까지함께다니자고했어요.사실그전에는내마음의중심에서엄여사가조금벗어나있었지요.내다른야망들로인해.그러나이제엄앵란이는확실히내중심을차지했어요.”

―두번낙선에겨우4년간국회의원배지를달고,그뒤2년은수감생활을했습니다.대차대조표로보면정치판에뛰어들어잃은것이많군요.

이제그로부터회한(悔恨)의답변을들을시점이됐다.나는기다렸다.

“아니오.전혀후회가없어요.난나름대로그세계를알고나왔으니까.그렇게해보지않았다면아직도내마음속에권력에대한선망이남아있었지않을까요.또늘두려움을갖고있었던곳이교도소였어요.그런데이제사내장부로서그런두려움도없어졌어요.과거에군(軍)출신들이선거유세에서‘중장’‘대장’을자랑하면,나는그까짓별몇개가아니라‘은하수’를가졌던스타였다고맞받았어요.그런데이제는여기에다진정한‘감옥별’까지얻었지않았나요.스스로얻은것이더많다고생각해요.”

그는2005년국회의원시절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지원법연장과관련,옥외광고물업자로부터1억8700만원을받은혐의로징역5년을선고받았다.그런데당시같은건으로불구속기소된열린우리당배기선의원은여전히재판에계류중이고아직단하루도옥살이를하지않았다.

“나는내행위가법적으로문제가있다면상응한벌을받겠다고들어왔어요.마음을그쪽에두니당당했어요.감형(減刑)을받으려면적어도3년은살아야한다고생각했어요.내가이를못이기고짜증내면정말형편없이못난사람이됩니다.게다가멀리서면회오는사람들에게초췌한모습으로마음상하게만들고싶지않았어요.그래서콘크리트로만든역기를들고,3kg짜리빗자루로스윙연습을했으며,추운감방생활을이기기위해냉수샤워를쭉했어요.그안에서읽었던책만열여섯보따리였어요.

의정부교도소에서는권노갑(權魯甲)고문과함께있었지요.그분은출감후동시통역사가되겠다며영어사전을펴놓고뉴스위크를읽어요.이번사면에나갈거라고확신하고있었지요.그래서그분에게‘나는한해를더지내야풀려날것같다.앞으로1년동안영어공부를해볼생각인데도와달라’고간곡하게부탁했어요.출감이틀전에이분이‘로먼할리데이(로마의휴일)’시나리오책을주면서‘고급영어와대중영어,엉터리영어가섞여있으니공부하라’고줬어요.그런준비를했는데나도같이나오게됐어요.”

―세월이흐르고나이가드는건막을수없지요?

“나는이전부터나이를초월했다고생각해왔어요.운동을열심히해왔기때문에,건강지수는50대초반으로나와요.체력이따라가니까마음이젊어요.나는지금도여인을보면즐거워져요.요즘젊은여인들은종아리가다예뻐요.우리동년배들이무슨자랑처럼‘20년동안여자근방에도안가봤다’고말하면,나는‘여보시오,그러면삶에무슨의미가있소.여인에게다가가보려는그런마음이라도있어야지’라고한마디합니다.아름다운여인을좋아하고사랑하는게무슨죄가됩니까.교도소에서여인을구경하지못한것이가장안타까웠지요.감방안에이신바예바(장대높이뛰기선수),샤라포바(테니스),힝기스(테니스),미셸위(골프)등신문스포츠면에서오려낸사진을붙여두고그안타까움을달랬어요.나는늘여인을사랑하고생각해왔고,그것은내게에너지를줬어요.”그러면서“최형,우리얘기가왜이쪽으로흘러가지요?”라며씩웃었다.

―이렇게힘이넘치면앞으로뭔가일을하셔야될텐데.

#권노갑씨,교도소에서“영어공부도와주겠다”

“나는일을하지않을겁니다.이나이가되자내가원하고추구한것이무엇이었지는깨달았소.그건자유스럽게사는것이었소.이런청바지와캐주얼복장이얼마나좋아요.”

―영화쪽으로는?

“영화를하지않을겁니다.영화협회나단체에어떤자리도맡지않을겁니다.하지만내인생에서미안한점이있어요.내아들(강석현)에게너무내식으로강요를해왔던것같아요.나는18살때신필름(신상옥감독)에입사해온갖잡일을하다가,1960년첫출연한영화‘로맨스빠빠’로내기회를잡았습니다.난삶을개척해왔어요.내게는그런힘이있었지요.나는아들도그럴줄알았는데….그래서이제나는아들을위해얼마쯤은살아야겠다는생각을합니다.만약아들이영화를제작할때나를필요로한다면꼭한편만영화에출연할겁니다.그렇지않으면더이상어떤영화에도결코출연하지않을것입니다.”

신성일은
신성일이지금껏영화에출연해‘남자주연(主演)’을맡은횟수만약510회다.이는광복이후로깨지지않는기록이다.그는당대의잘나가는여배우118명과공연했다고한다.전성기때는한해에65편이나주연으로출연한적도있었다.같은날여러영화에겹치기촬영하기일쑤였다.그는“내가겹치기출연함으로써당시영화에출연할수없었던피해자들이있었지않았느냐는생각이가끔들때있었다”고했다.당시관객동원23만명이라는공전(空前)의히트를쳤던‘맨발의청춘’(1964년)은단18일만에찍었던것이다.그럼에도이영화는여전히한국영화사의고전으로남아있다.1960년대초그의출현으로한국에서는젊은사람들의사랑,캠퍼스,뒷골목건달이야기등을다룬‘청춘물’이라는새로운장르가형성됐다.이제중년(中年)을훌쩍넘긴당시의청춘남녀들은그의모든것에열광했던것이다.잘생긴외모에짧은머리,반항적인눈빛,특유의억양(성우이창환씨의더빙),하얀가죽점퍼와청바지는당시젊음의아이콘이었다.그의대표작으로는‘로맨스빠빠’‘아낌없이주련다’‘떠날때는말없이’‘안개’‘흑맥’‘만추’‘별들의고향’‘겨울여자’‘도시의사냥꾼’‘길소뜸’등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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