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때청소년으로조직되었던수양단체.국선도(國仙妄徒)(·풍월도(風月徒)·원화도(源花徒)·풍류도(風流徒)라고도한다.《삼국유사》에는‘무리를뽑아서그들에게효제(孝悌)와충신을가르쳐나라를다스리는데대요(大要)를삼는다’라고하였다.
《삼국사기》에는‘처음에군신(君臣)이인재를알지못함을유감으로여기어사람들을끼리끼리모으고떼지어놀게하여,그행실을보아거용(擧用)하려하였다’하고,이들은‘서로도의를닦고,서로가악(歌樂)으로즐겁게하며,명산과대천(大川)을찾아멀리가보지아니한곳이없으며,이로인하여그들중에나쁘고,나쁘지아니한것을알게되어,그중의착한자를가리어조정에추천하게되었다’고그설치목적과수양과정을적고있다.이로써화랑도의설치는인물을양성하여그가운데인재를가려서국가에등용함을목적으로하였음을알수있는데,그소기(所期)의성과에대해《삼국사기》는‘현좌(賢佐:賢相)와충신이이로부터솟아나고,양장(良將)과용졸(勇卒)이이로말미암아나왔다’고하였다.
그설치연대에대해서《삼국사기》에는576년(진흥왕37)이라하였으나,562년에이미화랑사다함(斯多含)이대야성(大耶城:高靈)을공격하여큰공을세웠다는기록이있음으로보아신라는이때에이르러이전부터있었던미비된상태의청소년집단이던화랑도를국가조직속에편입시켜무사단의성격으로강화시킨것으로보인다.화랑도는처음에남모(南毛)·준정(俊貞)두미녀를뽑아이를원화(源花)라하였다.이들을중심으로조직하여300여명의무리가모였으나,이두여단장은서로시기하다가준정이남모를자기집으로유인하여억지로술을권해취하게한뒤강물에던져죽여버렸다.이일이발각되어준정도사형에처해지고,그무리들도화목을잃어해산하였다.
그후나라에서는귀족출신의외양이잘생기고품행이곧은남자를뽑아곱게단장하여이름을화랑이라하여받들게(단장으로)하자무리가구름같이모여들었다.이로써화랑도에는그지도자에화랑이있고그밑에낭도가있었는데,초기의화랑도는조직도미미한것이었으나576년이후국방정책과관련하여이를관에서운영하게되면서총지도자에국선(國仙:源花·花主)을두고그밑에화랑이있어각각문호(門戶:編隊)를맡았다.화랑도의총지도자인국선은원칙적으로전국에l명,화랑은보통3∼4명에서7∼8명에이를때도있었으며,화랑이거느린각문호의낭도는수천명을헤아렸다.화랑도의기원에대해서는①소도제단(蘇塗祭壇)의무사(武士)들이화랑도화하였다는설(申采浩),②조선고유의신앙단인부루교단(敎團)에서연유하였다는설(崔南善),③원시미성년집회에서연유하였다는설(李基白)등이있다.
화랑도는《후한서(後漢書)》<동이전(東夷傳)>에우리의옛사회에는소년들이모이는집이있다하여‘소년유축실(少年有築室)’이라한바와같이대체로원시시대이래로촌락또는부족단위로일정한연령층의청소년들이모여단체생활과공동의의식(儀式)을수행하면서사회의전통적가치와질서를터득하고동일한이상을추구하며가무와무예를익히던연령급단조직(年令級團組織)이,신라의국세(國勢)가팽창하여부족집단의규모를넘어선정치·군사조직으로발전하자,확대된영역과인구를지닌새로운국가적발전에뒷받침될인재의양성을목적으로재편성된것이라할수있다.화랑도는그조직과수양과정을통하여①위로는국가를위하고,아래로는벗을위하여죽으며,②대의(大義)를존중하여의에어그러지는일은죽음으로써항거하고,③병석에서죽는것을꺼리고국가를위하여용감히싸우다가전사함을찬양하며,④오직전진이있을뿐,물러섬을부끄럽게여겨,적에패하면자결할지언정포로가됨을수치로아는등독특한기질과기풍을연마,함양하였다.또한원광법사(圓光法師)가귀산(貴山)·취항(項)두화랑에게주었다는세속오계
(世俗五戒:事君以忠·事親以孝·交友以信·臨戰無退·殺生有擇)가화랑의정신적기저(基底)를이루었다.이와같은화랑의기풍은당시신라의종교적정신세계가받쳐주었다.그것은최치원(崔致遠)의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에나타나,그는‘우리나라에는현묘(玄妙)한도(道)가있다.이를풍류(風流)라하는데,이는삼교(三敎:儒敎·仙敎·佛敎)를포함한것으로,모든민중과접촉하여이를교화하였다.
그들은부모에게효도하고나라에충성을다하니,이는공자(孔子)의가르침이며(儒敎),또한모든일을거리낌없이처리하고,말을아니하면서일을실행하는것은노자(老子)의가르침이며(仙敎),모든악한일을행하지않고,착한행실만신봉하여행하는것은석가(釋迦)의교화(佛敎)’라하였다.실상화랑도에게일종의수호신같이숭배되었던미륵존(彌勒尊)이나,낭도중에승려가많았으며,승려가화랑의집회에관계하였다는점등은화랑도와불교와의관련을말하여주는것이다.또한,신선(神仙)사상을좋아하던진흥왕이화랑도를창설하면서나라를흥하게하는데는반드시풍월도가우선되어야한다고말한것도최치원이말한신라고유의신앙인풍류와관련이있는것이다.이밖에화랑의원유지이던포석정(鮑石亭)이국가의제의(祭儀)와결합되었고,김유신등화랑의출전(出戰)에주술적(呪術的)요소가포함되어있는것은,고대의전쟁에는주술적인면이크게작용하였던것과같이화랑도에도제의적인면이남아있어,화랑은무장(武將)으로서사령자(司靈者)의성격도겸하였음을엿볼수있다.결국화랑도는전래의청소년연령급단조직에통일전쟁을위한현실적국가주의와유불선의보편적정신세계를융합,건전한청소년을양성함으로써신라의삼국통일에필요한많은인재들을배출하였다.
성덕왕(재위702∼732)때김대문(金大問)의《화랑세기(花郞世記)》에는낭도를이끌었던역대화랑은200여명에이른다하였으나,오늘날에는전하지않는다.이밖에이인로(李仁老)의《파한집(破閑集)》,이곡(李穀)의《동유기(東遊記)》나안축(安軸)의《관동유기(關東遊記)》에나오는고성(高城)삼일포(三日浦)의단서(丹書)·마애단서(磨崖丹書)·36봉비(峰碑),강릉(江陵)한송정(寒松亭)의사선비(四仙碑),통천(通川)총석정(叢石亭)의애상비(崖上碑)·동봉고갈(東峰古碣)·동봉비(東峰碑)등은화랑의유적을알려주는것들이다.《삼국사기》《삼국유사》에나타난대표적화랑을시대순으로열거하면사다함(斯多含)·백운(白雲)·설원랑(薛原郞)·미시랑(未尸郞)·김유신·김영윤(金令胤)·근랑(近郞)·죽지랑(竹旨郞)·호세랑(好世郞)·구창공(瞿S公)·거열랑(居烈郞)·실처랑(實處郞)·보동랑(寶同郞)·관품(官品)·문노(文努)·보천(寶川)·부례랑(夫禮郞)·준영랑(俊永郞)·기파랑(耆婆郞)·김응렴(金膺廉)·요원랑(邀元郞)·예흔랑(譽昕郞)·계원(桂元)·숙종랑(叔宗郞)·효종랑(孝宗郞)등이있다.
신라말에이르러화랑이란말은쓰이지않고대신선랑(仙郞)·국선(國仙)등으로만불렸다.고려에서도화랑이란말은쓰지않고선랑은팔관회(八關會)의무동(舞童)을,국선은충렬왕이후양반의군역(軍役)을지칭하게되었다.조선시대에이르러서는선랑·국선이란말은쓰지않게되고화랑이란말은초기에남무(男巫:覡)를가리키게되어이를‘화랑이’라고하였으며,조선중기이후에는무부(巫夫:兩中),걸립승(乞粒僧)의무동,사당(寺堂)의거사(居士)등을지칭하게되었다.화랑도는그창설로부터삼국통일이완성된문무왕에이르는약l세기동안융성하여,삼국통일의어려운시기에는강한무사도정신으로나타나국난을극복하는데크게기여하였으나,통일후나라에태평시대가계속되면서쇠퇴하여신라가멸망할때까지존속하였다.그러나그정신은소멸되지않고고려와조선에이어내려오면서국난을맞을때는의병등의의기로치솟아,오늘날에도그정신은도(道)로서재흥(再興)을염원하는소리가높다.
세속오계(世俗五戒)
사군이충(事君以忠)
임금을충성으로섬김.
사친이효(事親以孝)
어버이를섬기며효도함
교우이신(交友以信)
믿음으로써친구를사귐
임전무퇴(臨戰無退)
전쟁에나아가서물러나지아니함
살생유택(殺生有擇)
살생은엄격히가려서해야함
신라진평왕때승려원광(圓光)이화랑에게일러준다섯가지계율.원광이수(隋)나라에서구법(求法)하고귀국한후,화랑귀산(貴山)과추항(項)이찾아가일생을두고경계할금언을청하자,원광이이오계를주었다고한다.즉,사군이충(事君以忠)·사친이효(事親以孝)·교우이신(交友以信)·임전무퇴(臨戰無退)·살생유택(殺生有擇)이다.이는뒤에화랑도의신조가되어화랑도가크게발전하고삼국통일의기초를이룩하게하는데크게기여하였다.
최치원(崔致遠,857∼?)
신라시대의학자.경주최씨(慶州崔氏)의시조.자고운(孤雲)·해운(海雲).869년(경문왕9)13세로당나라에유학하고,874년과거에급제,선주(宣州)표수현위(漂水縣尉)가된후승무랑(承務郞)전중시어사내공봉(殿中侍御史內供奉)으로도통순관(都統巡官)에올라비은어대(緋銀魚袋)를하사받고,이어자금어대(紫金魚袋)도받았다.879년(헌강왕5)황소(黃巢)의난때는고변(高)의종사관(從事官)으로서<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초하여문장가로서이름을떨쳤다.885년귀국,시독겸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서서감지사(瑞書監知事)가되었으나,894년시무책(時務策)10여조(條)를진성여왕에게상소,문란한국정을통탄하고외직을자청,대산(大山)등지의태수(太守)를지낸후아찬(阿飡)이되었다.그후관직을내놓고난세를비관,각지를유랑하다가가야산(伽倻山)해인사(海印寺)에서여생을마쳤다.글씨를잘썼으며<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은신라시대의화랑도(花郞道)를말해주는귀중한자료이다.고려현종때내사령(內史令)에추증되었으며,문묘(文廟)에배향,문창후(文昌侯)에추봉되었다.조선시대에태인(泰仁)무성서원(武成書院),경주(慶州)의서악서원(西岳書院)등에종향(從享)되었다.글씨에<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진감국사비(眞鑑國師碑)><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무염국사백월보광탑비(無染國師白月光塔碑)><사산비(四山碑)>가있고,저서에《계원필경(桂苑筆耕)》《중산복궤집(中山覆集)》《석순응전(釋順應傳)》《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등이있다.
≪참고문헌≫三國史記
≪참고문헌≫三國遺事
≪참고문헌≫韓國史硏究草(申采浩,乙酉文化社,1974)
≪참고문헌≫朝鮮道敎史(李能和,韓國學硏究所,1977)
≪참고문헌≫朝鮮思想史(玄相允,半島文化社,1978)
≪참고문헌≫화랑문화의신연구(한국향토사연구전국협의회,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