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zoomin]
예인(藝人)인생50주년공연김덕수
“다섯살때남사당패였던아버지따라광대의길로
20대땐한계느껴무대위에서장구채부러뜨리기도
전통예술에대한정부지원너무부족…전용극장있었으면”
‘사물놀이꾼’김덕수(55)씨가올해로예인인생50주년을맞았다.1957년9월다섯살의나이로조치원난장에서곡예를시작한아이가사물놀이의대명사로굳건히자리잡고,세계를누비면서우리소리를전하고후학까지양성하고있는것이다.
지난8월13일서울충무아트홀에서50주년기념공연‘길’(9월5~9일)을준비하고있는김씨를만났다.후배들과공연연습을하던그는점심식사까지거른채인터뷰를했다.이야기를나누다가자리에서일어나장구나북을연주하기도해인터뷰는거의오감을자극하는공연에가까웠다.
50주년기념공연제목이왜‘길’인가.“사람들은누구나길을걷는다.나는5세때부터광대의길을걷기시작했다.내아버지역시남사당패에소속된광대였다.나는집이아닌길위에서아버지로부터광대정신과철학을배웠다.
하지만내가걸었던길은일제강점기에내아버지가걸었던광대의길과는또달랐다.전국마을을유랑하며걸었던길은내인생의길이었고동시에한국현대사가관통해온길이었다.데뷔당시우리국민의의식주상태는최악이었지만나와아버지가속한남사당패와신명을공유할수있는정신적여유는있었던것같다.”
1957년첫공연때기억이아직도남아있나.“나는3남6녀중차남이었다.아버지는둘째아들이태어나면당신의대를이어남사당놀이를시키겠다고결정해놓은상태였다.1957년추석다음날아버지는나를조치원난장으로데려갔다.남사당놀이에는5세정도의아이만이할수있는역할이있고,그아이를새미라고부른다.나는고깔을쓰고장상을입고남사당패인간탑맨위로올라갔던기억이난다.주변에있던사람들은내게큰박수와환호를보냈다.”
남사당패는남자들로구성된유랑연예집단이다.남사당패는오랫동안사회구성원으로서정당한대우를받지못한채소외되었다.김씨는남사당패의일원으로어른들사이에서새우잠을자거나몇십리씩밤길을걷기도했다.여섯살때부터는다른사람처럼행하(자기몫의수당)도받았다.
난장이란무엇인가.“본래부정기적인시장에서유래한말이다.상업적인거래가이뤄지는곳이면서이벤트와축제의장이었다.그곳은인간의모든행위가이뤄지는곳이다.난장은하루에끝나는것이아니라보통길게는열흘에서2개월간밤낮을가리지않고계속되기도했다.그속에는혼란과소요만있는것같지만,사람들이함께어울려만들어내는질서가느껴지기도한다.내가발견한난장정신은카오스속의질서라고할수있겠다.부대끼는사람간의소통과시끌벅적함속에서새로운예술의기운도찾아볼수있다.”
난장에서데뷔한김씨는7세때전국농악경연대회에서대통령상을수상했고1964년까지남운용·송순갑등명인으로부터남사당전종목을전수받았다.또1980년대중반까지김숙자·김석출·지영희명인으로부터경기도도당굿·동해안별신굿등을전수받았으며,1995년국악의대중화와세계화공로로국민훈장모란장을받았다.
남사당놀이가1964년중요무형문화재3호로지정됐는데.“문화재로지정됐다는것은보존하지않으면사라질위험이있다는뜻도가진다.이전까지는전국을돌며마을과마당에천막치고공연을할수있었는데,1960년대중반부터남사당의무대는점점줄어들었다.기형적인산업화로인해마을의축제문화가사라진것이다.과거관혼상제는마을행사로도치러졌는데,점점껍데기만남게됐다.결혼식과장례식에는인심과잔치라는개념이없어졌고,정해진시간과순서에맞춰끝내는단순한이벤트가된것이다.국악은생활속에서살아있다가대학교국악과커리큘럼안으로들어갔고언제부턴가서양음악의틀안에서교육되기시작했다.이런것이아쉬워서사물놀이를만들게된것이다.”
사물놀이는1978년2월서울원서동의‘공간사랑’에서열린‘제1회공간전통예술의밤’에서첫선을보였다.남사당패의후예인김덕수(장구),김용배(꽹과리),이광수(북),최종실(징)등이모여공연했고,민속학자심우성씨가‘사물놀이’라는이름을붙였다고한다
내년이면사물놀이가탄생한지30주년이되는데.“사물놀이는군사정권을거치면서한때시위와투쟁의도구로여겨지기도했다.전통문화가변질된것이다.하지만사물놀이는우리민족의근본적인흥이고울림이다.또한류의근본에너지와기운이라고할수있다.이러한사물놀이는종합예술의형태를지니는데,요즘대학의음악교육은기악중심으로세분화되는것같다.우리전통음악은가무악(歌舞樂)일체로이뤄지므로노래,춤,연주를모두할수있는‘멀티플레이어’가돼야한다.나역시이모든것을함께배웠다.내년에는사물놀이30주년기념공연을할예정이다.”
그렇다면사물놀이에들어있는정신은무엇이라고생각하나.“첫째는대동(大同)정신으로모두가함께잘살자는것이다.둘째는홍익인간(弘益人間)정신으로세상사람모두이롭게하자는것이다.셋째는상생(相生)정신으로서로싸우지말고같이나누며살자는것이다.이것이사물놀이를포함한한국전통예술이가지고있는근본정신이자철학이다.”
자신만의꿈을갖기도전에광대라는삶이주어졌는데.“사실인문계중·고등학교에진학하고싶었다.공부를열심히하고싶었다기보다다른아이들처럼어머니가싸주는도시락을먹으면서정상적으로학교에다니고싶었다.하지만초등학교를졸업하면서국악예술학교에스카우트됐다.그때부터정식으로판소리,민요,기악등다양한국악을배웠고해외공연도하게됐다.당시박헌봉교장선생님의배려로학교에서자취를하면서집중적으로교육을받았다.”
사물놀이를안했다면무엇을했을까.“국악예술학교졸업후단국대요업공학과에진학했다.내손으로무언가를만드는게좋다고생각했다.그리고공연은한회,한회사라지지만도자기는영원히남을것만같았다.학교에서이론만가르쳐서재미가없어2학년때중퇴했는데사물놀이를하지않았다면도예가가되지않았을까.”
사물놀이를그만두고싶을때는없었나.“왜없었겠나.20대말,30대초에가끔있었다.하지만그만두고싶었던이유는정작사물놀이가싫어서가아니라내가자신의한계를뛰어넘지못한다고느낄때였다.무대위에서관객을앞에놓고장구채를부러뜨린적도있다.하지만수양이덜된시절의고비를잘넘기자,연주를통해오감(五感)이활짝열리는환희를느낄수있었다.‘이러한유아독존의환희때문에그토록많은사람이예술을해왔구나’라는생각이들었다.많은후배가그환희를함께느꼈으면좋겠다.”
한국예술종합학교전통연희과교수로도활동중인데.“소리꾼과무대공연자는일찌감치대우를해줬지만생활속연희꾼은천시하는풍조가있었다.한국예술종합학교연희과는풍물,탈춤,무속,사물놀이등을교육하는곳이다.연희는국악의원형이다.남도의무속에서민요와판소리가나왔다.
또사물놀이는농악의기본이고농악에사용되는악기로만이뤄져있다.꽹과리,징,북,장구는우리나라어느마을에나비치돼있던악기다.가야금이나거문고등은사대부의악기였다.우리전통악기는주로타악기다.음들이끊어지지않고연속적이며한음을가지고떨기도하다가상승과하강의반복을통해무한대로향한다.곡선적인호흡에의한리듬가락이라우리를둥글게감싸는자연의모습과도일맥상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