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 역사적 관점

대마도,역사적관점



쓰시마섬으로불리는대마도는임진왜란이후조선통신사등외교적활동이활발했던곳중의하나이다.대마도는남북으로72km,동서로16km인길쭉한모습의두개섬이다.총면적은714㎢.이섬은일본보다는한국에가깝다.한국남단에서는53km,일본규슈(九州)에서는147km떨어져있다.

▲쓰시마섬으로불리는대마도는남북으로72km,동서로16km인길쭉한모습의두개섬으로이루어져있다.대마도는일제의비극이고스란히전해지고있는곳이기도하다.구한말면암최익현선생도일본군에의해대마도이즈하라에연금당해있던중단식으로항거하다순국했다.그를기리는순국비는백제스님이건너와창건했다는이즈하라시내의스이젠지(修善寺)에서있다.

*1642년제작된우리나라최초의전국지도이다.이지도에보면동해안의

울릉도는물론대마도와제주도등이분명하게우리영토로표기되어있다.


◇대마도는어떤땅이었을까?

임진왜란이끝난다음인숙종45년(1719),신유한(申維翰)은통신사의제술관(製述官·기록을담당하는관리)으로일본을다녀와’해유록(海遊錄)’을남겼다.
"대마주(對馬州)의별명은방진(芳津)이라고도한다.토지는척박해서채백물(百物·100백가지産物)도생산되지않는다.산에는밭이없고들에는도랑이없고,터안에는채전(菜田·채소밭)이없다.
오로지고기를잡고해초를캐서팔아생계를유지하는데,대마도인들은서쪽으로는(조선의)초량(草梁·지금의부산광역시동구초량동)에모이고,북으로는일본의오사카(大阪)와당시왜국의수도인나라(奈良)에통한다.동으로는나가사키(長崎)에서장사하니,바다가운데의한도회(都會)와같다."
세종24년(1442)신숙주(1417∼1475)는통신사의서장관으로일본에가대마도에서계해약조(癸亥約條)를체결하고돌아왔다.그리고성종2년(1471)’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저술했다.
"군(郡)은8개이고사람은모두바닷가포구에서살고있다.대마도의포구는82개나된다.남북은3일이면다돌아볼수있고동서횡단은하루나반나절이면족하다.바다와접한사면은모두돌산이고땅은척박하다.백성은가난해서소금을굽거나물고기를잡거나해산물을잡아,팔아서살고있다.종(宗)씨가대대로도주(島主)가되는데…"
이현종(李鉉淙)이편찬한’조선전기대일교섭사'(1964년한국연구원간행)에따르면대마도의유력자중에는조선의관직을받은’수직왜인(受職倭人)’과특별히세견선이나세사미를배당받는자들이있었다.이키시마(壹岐島)에있는수직왜인은3명인데,대마도의수직왜인은17명이나된다.
대마도인들은조선조정으로부터받은교지(敎旨)를대개’고신(告身)’이라고한다.대마도에서는오자키의소다(早田)집안,지다류(志多留)의다게다(武田)집안,이나(伊奈)의쇼야(小野)집안에서이러한고신이전해오고있다.
고신을받은대마도인들은1년에한번조선에도래하여,관직에상당한예우를받고특별한이득을얻어갔다.조선초기일본에서조선으로들어오는세약선(歲約船)·수직인선(受職人船)·수국서인선(受國書人船)의수가204척이었는데,그중에서대마도배는절반에육박하는124척이었다.
◇’역사기록’대마도가우리영토임을생생입증
대마도에관한가장오래된기록을담고있는책은’삼국지(三國志)’위지(魏志)왜인전(倭人傳)이다."대마국은구야(狗耶·가야)에서강건너1000여리에떨어진곳에있다.그곳을다스리는우두머리인대관(大官)은비구(卑狗)라하고,부관(副官)은비노모리(卑奴毋離)라고한다.대마도는망망대해에떠있는절해의고도다.넓이는대략400여리에이른다."
"무릇대마도는옛날에는신라국과같은곳이었다.사람의모습도그곳에서나는토산물도있는것은모두신라와다름이없다."(13세기말의일본책인’진대(塵袋)’제2권)
"대마도는섬으로서본래우리나라의땅이다.다만궁벽하게막혀있고,또좁고누추하므로왜놈이거류하게두었더니개같이도적질하고쥐같이훔치는버릇을가지고경인년부터뛰어놀기시작하였다."(태상왕이었던태종이세종때대마도정벌을하기전에군사들에게내린교유문)
다음은대마도정벌이후조선관리인강권선에게일기도영주대내전(大內殿)의관반(館伴)인노라가도로(老羅加都老)가한말이다.
"대마도는본래조선의목마지(牧馬地:말기르는땅)이므로대내전(大內殿)이조선과더불어협공하여대마도를귀국(:조선)에돌리고자하다가불행히도세상을떠났는데지금의영주는그사실을알지못합니다."
풍신수길이조선침략에대비하여무장에게명령해서만든지도인’팔도전도’에는,독도뿐아니라대마도도조선의땅으로나와있으며,’공격대상’이라고적혀있다.일본도대마도를일본땅으로여기지않았다는증거이다.
▽고려시대

고려공민왕17년(1368)대마도주가고려의만호벼슬을가진사신(使臣)으로파견된이래대마도는600여년간조선과대국휼소국(大國恤小國)또는조공회사(朝貢回賜)의관계를맺어온속방(屬邦)이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고려문종36년(1083)부터공민왕17년(1368)사이대마도에서사신을보내방물(方物)을바친기록이있다.

고려말부터대마도와일본근처에있는이키시마(壹岐島)·송포(松浦)등지에서발호한왜구가한반도남해안을약탈하고때로는육지깊숙이침입하였다.이에대해고려는대마도주종(宗)씨와규슈의탐제(探題)이마가와(今川)·오우치(大內)등호족에게사신을보내,왜구를금압(禁壓)하고고려와는평화적으로교역할것을요구하였다.
고려말왜구가횡행하게된근본원인은1218년과1274년두차례에걸친여원군(麗元軍)의일본원정이있은후,일본과고려·중국의통교가단절되었기때문이다.이시기일본은남북조(南北朝)의쟁란(爭亂)에빠져있어,규슈와대마도등에는중앙의통제력이미치지못했다.
▽조선시대

조선민족은대륙문화의계승자로서대체로도서(島嶼)를경시하였다.조선인들은대마도를척박한섬으로만보았다.이러한땅은반역음모지(叛逆陰謀地)가될염려가있어거주하는것을싫어했다.그와반대로일본본토에서는범법자와범죄자가대마도로흘러들었다.

이들로인해대마도는해적소굴이되었다.이들이조선의해안지대를수시로침범해약탈하자조선은강부(降附·항복하여굴복하다)를권고하기도하고,토벌(討伐)을수행하기도하였던것이다.
조선의3대임금태종(재위1401∼1418년)은왜구에대해강경책을펼쳤다.그는왕위를세종에게양위했으나,군사권은장악하고세종원년(1419)6월17일,왜구의근거지인대마도정벌을단행했다(己亥東征).
이에따라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이종무(李從茂)가병선227척과장병1만7385명을인솔해,왜구의근거지인대마도의천해만과오자키(尾崎)·후나고시(船越)·진나(仁位)를공격했다.
대마도에상륙한이종무군은적선129척을나포하고왜구가사는집1939호를불질러태워버렸다.생포한왜구는12명이었고참수(斬首)한왜구는114명이었다.내친김에이종무군은왜구들이심어놓은곡식도베어버려,요행히산속으로도망친자들도굶게만들었다.
이종무군이감행한기해동정(己亥東征)으로인해대마도주와대마도민들은경제적으로큰타격을입었다.조선은대마도가아닌다른곳에서오는왜인들에게교역을허가했으나,대마도인들의도래는허용치않았다.
세종2년(1420)윤정월10일대마도주는다시사자를보내,"대마도는조선을주군으로하며,그주명(州名)을지정받고자한다.동시에조선조정에서주군인(州郡印)을사여(賜與)해달라"고요청해왔다.
동년동월23일조선은대외적으로는외무장관일을맡는예조판서허조(許稠,1369∼1439)를통해대마도를다시경상도에예속시키고,그군관에대한관례대로관인(官印)을사여하였다.

일부에서는고려시대부터조선시대까지의대마도와관계를단순한조공관계로파악하는경향이있다.즉동북아세계에서조공관계는국제적인외교절차일뿐그것만으로영토권을주장할수없다는것이다.또중국과우리나라는수천년간조공관계에있었지만,우리나라가완전한주권을행사하는데전혀지장이없었다는논리까지내세워대마도역시마찬가지라는주장이다.
하지만조선은대마도와단순한조공관계에그친것이아니라경상도에분명하계예속시켰다.이것은역사에분명하게나와있는것이며,이후수백여차례제작된조선지도에서수없이확인된다.

따라구한말까지대마도가조선의영토임은의심할여지가없다.

자료출처: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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