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가장대표적인지도를꼽으라면대부분대동여지도를꼽을것이다.조선시대에는우리나라최초의전국지도인8도총도를비롯해,실학자정상기가제작한동국지도등꾀많은지도가제작되었긴하지만,그정확성과세밀함은물론예술적인아름다움까지느껴지는대동여지도가단연돋보이는것은사실이다.
그런데그대동여지도를비롯한수많은지도는과연어떻게그려졌을까?우리는어렸을때한번쯤은위인전을통해김정호가개나리보짐하나를둘러매고전국을돌아다니며지도를그리는장면을읽었을것이다.
그러나과연눈대중과일정하지도않는보폭을기준으로과연그렇게정밀한지도를그려낼수있었을까?
그리고그대표적인것이바로8도총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정상기는백리를일척으로십리를일촌으로하는백리척축적을창안하여이같은지도를완성할수있었다.
이지도를바탕으로정조임금때에는아국총도,조선팔도지도등이그려젔으며,이지도의단점인섬이나팔도에대한표시가좀더상세해지고분명해져갔다.
즉이지도는관념도에서실측도로전환하게된계기를마련한그림이라할수있다.
기리고차란거리를측정하던수레로중국에선진(晉)나라때부터사용되었다고전하는데《송사(宋史)》에는둘레가18자인바퀴가돌때마다그회전수가톱니바퀴[齒車(치차)]에나타난거리를알수있게되어있었다고한다.
우리나라에선1441년(세종23)왕과왕비가온수현(溫水縣;지금의溫陽)의온천에가던도중,가마골에서사냥하는구경을하기위하여처음으로말이끄는초거를탔는데,그수레가바로거리를잴수있게만든거리계차,즉기리고차였다한다.
이수레가처음제작되었을때는단순히톱니바퀴의원리에따라1리를가면한번종이울리는정도였다.
하지만계조를거듭하면서반리를가면한번치고1리를가면두번치며5리를가면큰북이울리고10리를가면북이여러번울리게된다.
따라서지도제작자,혹은측량자는수레위에앉아서도종과북소리만으로거리를측정할수있게된다.
그러나이도구는휴대가불가능하고유지비가많이든다는단점이있다.특히해안이나산간지방처럼수레를사용하기힘든지역에서는운영이더욱힘들다.그리고이럴때쓰는것이마를엮어만든간승(間繩)이다.지금은사라지고없지만모내기할때일정한간격으로표시하여줄을띠우는노줄역시여기에해당한다.한마디로조선시대줄자라고생각하면된다.그밖에대나무자인竹尺(죽척)등도보다정밀한거리측량이나지도제작에쓰였다.
김정호의초기작청구도역시실측도라기보다는,그동안조선시대전해내려오던각종지도와지리서를참고하여제작한것이었다.따라서이지도는순수한의미의지도와,각고을의특징을적어놓은지리의개념이혼합되어있는특징을가지고있다.
하지만김정호는여기서만족치않고실제측량한지도를제작하게되니그것이바로대동여지도였다.즉대동여지도는실측도였던만큼청구도에서부족하였던지도적인측면을보다섬세하고정확하며간편하면서실생활에유용하게만들수있었다.뒤이어지리서인대동지지를따로편찬하여청구도의地志(지지)적인면을더욱확대하고보충하였다.
그런면에서볼때김정호는단순한지도제작가를넘어종합적인지리학자였다.그는우리나라는물론중국의역대지리적문헌을모조리섭렵한후,자기나름대로의독창적인이론과수법을지도에적용하였다.
그결과대동여지도에서는마치한국화를보는듯한필체로,산맥과하천이그려지게되었다.그리고도로망은그물을친것처럼종횡으로전개되고,그위에십리간격의이정점을더해보는사람으로하여금보다멀고가까운곳을쉽사리알게하였으며,보는동안실제로산천을여행하는듯한착각마저들게하였다.
이렇게대동여지도는조선이보유하고있던우수한장비와,축척된지도제작기술,여기에김정호의혼신에담긴열정이빚어낸최고의작품인것이다.간혹위인전기나잘못된상식으로김정호가대원군에의해지도를너무상세히제작하여우리나라기밀을유출하려하였다는의혹을받고결국죽음을당한것으로인식되기도하나,그것은전혀근거없는일제가조작해낸루머에불과하다.오히려김정호는대원군시절병조판서직책을지냈던신헌에게지원을받아가며우리나라의지도를완성하였다.
우리국토를보다정확하고보자자세히알고자하였던마음은저멀리최고위층인대원군에서부터,변변한벼슬조차하지못했지만지도제작에대한열정만큼은누구보다도강렬하였던김정호에이르기까지한결같은것이었다.
자료출처:yah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