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LP여행]양희은
청개구리에서뛰어우물밖세상속으로
화려한의상이나외모와는거리가멀었다.71년여름,대중들앞에나타난양희은의첫모습은선머슴애처럼청바지,청난방,청색운동화그리고생머리에통기타가전부였다.
그러나아름다운멜로디에싯적인노랫말은대중들의가슴을파고들었다.거침없이불러대는그녀의노래에는신선한향기가진동했다.힘차고우아하면서도감정이절제된맛깔난노랫가락은김민기의곡들에강력한생명력을불어넣으며기존의낡은사랑타령가요들을여지없이파괴하는위력으로대중들에게전파되었다.
또한보수적사회분위기를벗어나청바지,통기타,생맥주로대변되는70년대청년문화탄생에불을지피며그중심에선대표노래꾼으로자리매김했다.
어느덧50줄에들어선양희은.30년의세월은야속하게당시의흔적을거의지워버렸지만당당하게내뿜는그녀의노래만큼은세월을잊은듯여전히짙푸른빛깔을내뿜고있다.
서북청년사건때진남포에서단신남하,육사4기포병장교를거쳐미국유학까지간엘리트였던부친양정길과서울토박이로명동의유명부띠끄<주크양장점>의고용디자이너였던서울예대성악과출신어머니윤순모의장녀로태어난양희은.
고모부는대한제분사장이었으니풍족한집안의쾌활한개구장이딸이었다.아버지는돌전에말문을트고앙증맞게노래를잘부르는어린딸에게노래를시켰다.2살때소아마비를앓았다.지금도웃을때입이한쪽으로쏠리는것은이때문이다.
재동초등학교3학년때는YMCA어린이합창단원으로활약했고고등학교때까지전교생앞에서애국가와교가선창,졸업식송사등을도맡아했을만큼비범한아이였다.경기여고시절에는노래말고도신문반원,각종영어웅변대회1등입상등으로이미학내외에서만능재주꾼이란명성을얻었다.
간경화증으로부친이일찍타계한후기울어지기시작한가세는어머니의잘못된빚보증까지겹쳐풍전등화처럼흔들렸다.노래아르바이트를시작했다.
양희은은“30년전에이미전문직업을가진어머니의영향으로여자가일을갖는것이별스럽지않았다”며아르바이트를하던자신을소녀가장으로표현한당시의사회분위기가못마땅했다고말한다.
본격적인노래인생은대학입시에서낙방을하고재수를하던늦여름쯤우연히이루어졌다.명문대를다니는친구들이의기소침해있을까걱정되는마음에양희은을대학생들의명소로자리잡은명동의청개구리로이끌었다.
이때객석에있는다른경기여고출신여대생이양희은을발견,사회를보던이백천에게‘경기여고에서노래를제일잘하던양희은이와있다’며노래를청하는쪽지를전달했다.느닷없이호명된그녀는서유석의기타반주에맞쳐‘웬즈데이차일드’와‘에스터데이’를멋들어지게불렀다.
이때양희은의노래를우연히들은기독교방송PD가“평론가최경식이진행하는<영840>프로에소개를하겠다”고집요하게집으로연락을해와첫방송을탔다.내친김에YMCA주최1회포크페스티벌에아마추어가수로참가하기도했다.
이후몇차례‘청개구리’에나가도비두의김민기,김도향,송창식,윤형주와친분을쌓고그들의노래를들으며혼란스럽던심신을추스르고대학입시공부에만전념하던중화재를당하는액운이겹쳐자포자기에빠져버렸다.
그러나늘그녀를아끼는친구들의도움으로서강대사학과에응시,합격했다.71년2월,친구들의고마움에답례를하기위해재동초등학교동문김민기를찾아가기타반주를부탁,청개구리에서친구들만을위한‘노래하는새’라는개인리사이틀을열었다.
데뷔곡아침이슬은여전히애창되는불멸의국민가요.처음양희은은청개구리에서김민기가악보를끄적이며연습삼아부르는‘아침이슬’을듣고한순간에반해버렸다.
김민기의대학친구가전해준찢어진악보를테이프로붙여간직했을만큼넋이나갔던첫노래였다.데뷔음반취입때용기를내‘불러보고싶다’고부탁하자김민기는흔쾌히곡을주었다.
71년9월,양희은은대표곡아침이슬등4곡의창작곡과일곱송이수선화등6곡의번안곡이수록된데뷔앨범<아침이슬-유니버샬,KLS-23>발표와더불어YMCA강당에서Y틴들을대상으로<포크콘서트희은이와함께>를개최하며본격적으로대중앞에섰다.
동아방송라디오를통해공개방송으로진행된이공연의사회는DJ임문일이서유석,김민기,뜨와에무와등은우정출연을해주었다.
연이어발표한컴필레이션음반<71년폭송히트모음1집.이루어질수없는사랑-유니버샬,KLS27,71년9월>과2집<서울로가는길-유니버샬,KLS40,72년12월>도뜨거운팬들의사랑속에양희은의줏가를상향조정했다.
그러나건전가요로도선정되었던아침이슬등히트곡들이군사정권에의해일순간금지곡으로묶이면서가혹한음악적시련이다가왔다.
‘금지’를먹고산불멸의노래30년
데뷔때부터주무대였던명동오비스케빈등에서당시기자초봉의세배가넘는4만원의월개런티를받았던양희은.
1972년10월엔TBC라디오<팝송다이얼>DJ로영역을넓혔다.대학생,가수,방송DJ등1인3역이상의활동으로눈코뜰새없던와중에터진73년초서유석과의결혼설.불발탄이었지만당시양희은과서유석의인기만큼이나세간의관심은뜨거웠다.
73년정부에의해건전가요로선정되었던<아침이슬>이금지곡목록에오르면서시작된양희은의음악적시련.1,2집의‘그날’,‘엄마!엄마!’,‘서울로가는길’,‘작은연못’,‘백구’등도74년어느날부터방송에서사라져버렸다.그녀가발표한200여곡중금지곡만도무려30여곡.
그러나독재정권이통제를가할수록금지된노래들은동시대젊은이들에게더욱해방감을안겨주며불멸의생명력을키워갔다.
오랜기간대중매체에서사라진곡들이었지만대학생들의시위현장에서,소외된노동현장에서,국민들의각종모임에서더욱더질기고강한생명력으로시퍼렇게불리어졌다.
아직도양희은을저항의식이강한‘운동권가수’로기억하는사람들이많은것은이때문.정작양희은자신은‘결코운동권이아니었고암울한시절의시대상황이내가부른노래까지어둡게만들었을뿐’이라고덤덤하게이야기한다.
“한마디로우스꽝스런해프닝의연속이지요.‘퇴폐가사’,‘시의부적합’,‘허무주의조장’이란명분인데도무지이해할수없었습니다.”
양희은의회고처럼당시수많은금지곡들은아전인수식판정으로양산되었다.<이루어질수없는사랑>은왜사랑이이루어질수없느냐는꼬투리였고,<작은연못>은정권을비꼰다는이유에서,<아침이슬>은가사속의붉은태양이북측의인사를암시한다는억지해석이내려졌다.
퇴역을앞둔늙은선임상사가군복무중이던김민기에게막걸리두말을내고자신의30년군인인생을노래로만들어달라고요청해작곡한<늙은군인의노래>.
노병의애환과설움을담은이노래는<양희은-서라벌,SLK1041,78년>음반이발표되기전인76년겨울에이미만들어져병영에서병영으로구전되어진졸병들의애창곡이었다.
그러나‘병영에서괴상한노래가돌고있다’는소식을접한국방부장관이‘군기해의’,‘사기저하’를이유로전군에노래금지령을내렸다.
또한문공부장관에연락해사상최초의국방부장관지정금지곡1호를탄생시켰다.
그러나이곡은80년이후집회현장에서<군인>을투사,노동자,농민,교사등으로바뀌어불리어지면서대표적인운동가요로탈바꿈했다.
<늙은군인의노래>삭제여부는음반사의상업논리까지개입되며동일음반에무려6가지이상의변형버전을양산되는초유의결과까지빚어냈다.
“요주의인물’로낙인이찍히자늘도청과감시가뒤따랐다.‘방송을마치고나오던중정보부요원들에게끌려가빵집에서추궁을당하기도하고,77년기독교방송‘우리들’진행도중사장으로부터‘네잘못이아니지만당분간쉬라’는말을들었을때는정말견디기힘들었다”고양희은은회고한다.
그후방송출연교섭은고사하고78년어렵게출연한‘토요일토요일은즐거워’에서‘늙은군인의노래’를부른것을끝으로83년까지노래판을떠나야만했다.
8년만에대학을졸업하고시작한봉제수출업체인아비스상사에서의직장생활.암수술과교통사고로인한투병생활등고난도많았다.마음을추스리기위해외국으로훌쩍배낭여행도떠나보았지만늘노래에대한갈증은날이갈수록더욱더그의목을타게만들었다.83년자신이작시한‘하얀목련’은그런자신의마음을애절하게드러냈던재기곡.
KBS라디오‘양희은과함께‘의DJ로복귀한뒤84년에야그녀의모든금지곡은해금되었다.87년재미사업가조중문씨와결혼,미국으로이민을간후93년귀국때까지가끔고국을드나들며서정적멜로디의맑은노래들을발표하며노래에대한갈증을해소했다.
양희은은김민기로부터방의경,신중현,서유석,김광희,이주원,김정호,하덕규,이병우등끊임없이새로운작곡가와음악작업을계속해오고있다.
‘가장좋아하는곡은앞으로부를새로운곡’이라고단호하게말할정도로과거의히트곡보다새로운곡에강한집념을보인다.어쩌면데뷔곡<아침이슬>을능가하는노래를부르고픈음악적부담때문일지도모르겠다.데뷔30년을맞아서도매일4시간이상노래연습을하고끊임없이대중들과새로운음악적호흡을갈망하는양희은.1만번도넘게불렀다는<아침이슬>에게국민들은<가장즐겨듣는대중가요1위>라는사랑으로화답했다.
그녀의음반중마니아들사이에가장희귀음반으로대접받는<양희은-당신의꿈,유니버샬,KLS56,73년>은록의대부신중현과의새로운음악적만남의결과물이였다.
‘비브라토없이5시간내내함께노래를하며하프연주등을넣는등신중현과의포크록작업은흥미로왔다’고양희은은기억한다.‘작곡에는뜻이없고작사는계속하고싶다’는그가만약한대수,김민기,방의경처럼자신의독자적인음악세계를가진싱어송라이터였다면어떤빛깔의새로운음악이탄생했을까?
최규성가요칼럼니스트kscho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