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憂堂(삼우당) 文益漸(문익점) 유적지 탐방
三憂堂(삼우당)文益漸(문익점)유적지탐방 박태선기자
소재지:경상남도산청군신안면신안리

▲문익점신도비각전경©박태선기자

三憂堂(삼우당)文益漸(문익점,1329~1398)의업적을기리기위해세운비석이다.
순조34년(1834)강화도물가운데서돌을캐어각고을들의성주들이협력하여등짐으로3년여를운반하여도로옆에세운것이라한다.

▲문익점신도비각©박태선기자

1935년失火(실화)로碑閣(비각)이소실되었고,1943년현재의장소로옮겨졌다.

▲문익점신도비©박태선기자

문익점신도비:경상남도문화재자료제53호
신도비에서왼쪽으로난길을따라조금더가면도천서원과신안사재그리고선생님의묘가있다.

▲홍살문과도천서원,신안사재전경©박태선기자

道天書院(도천서원),新安思齋(신안사재):경상남도유형문화재제237호
서원은조선시대의사설교육기관이며,대유학자인先賢(선현)들의제사를지내는곳이다.

▲道天書院(도천서원)©박태선기자 ▲道天書院(도천서원)현판©박태선기자

이곳은중국으로부터목화씨를들여온문익점선생의공적을후세에알리고,그의학문과덕행을추모하기위해,세조7년(1461)에건립한서원으로명종9년(1554)에왕으로부터‘道天(도천)’이라는扁額(편액)을받았다.

▲東齋(동재)©박태선기자

임진왜란때불타버린것을그뒤에중수하였고,정조11년(1787)에다시같은이름의편액을받았다.고종8년(1971)大院君(대원군)의’서원철폐령’으로헐린뒤,고종28년(1891)三憂祠(삼우사)를재건하면서서원으로복원되었다.

도천서원은사당과강당,바깥出入門(출입문)을일직선상으로배치하여,앞에는교육영역을두고뒤에는제례의영역을두는일반적인서원의배치형식인前學後廟(전학후묘)를따르고있다.

▲西齋(서재)©박태선기자

앞쪽의중앙강당은유생의교육,회합및토론의장소로사용되었으며,東.西齋(동.서재)는유생들이공부하며거처하는곳이다.중심축에서직각을이루는왼편에新安思齋(신안사재)라는건물이있다.

▲新安思齋(신안사재)©박태선기자 ▲新安思齋(신안사재)현판©박태선기자

이건물은이서원의성격을잘나타내주는것으로,문익점선생의제사때祭官(제관)들의숙소로사용되었다.명종6년(1551)창건되었으며,지금의건물은순조4년(1804)에다시지은것이다.신안사재의존재는이곳이교육보다제사의기능을더중시하였음을보여주고있다.
이서원바로옆산에는문익점선생의묘소가있다.

▲문익점묘소가는길©박태선기자

고려말의文臣(문신)이자學者(학자)인문익점은공민왕12년(1363)元(원)나라에使臣(사신)으로갔다가,귀국할때붓통속에木花(목화)씨를몰래숨겨들여온인물로유명하다.장인인鄭天益(정천익)에게주어재배케함으로써우리나라에서도목화재배가시작되었다.

▲묘소전경©박태선기자

처음에는재배기술을알지못해한그루만을살릴수있었을뿐이었지만,3년간의노력끝에그기술을완전히터득할수있었다.
그러나목화씨를제거하고실을뽑는방법을몰랐는데,때마침정천익의집에머물고있던중국승려로부터씨를빼는씨아와실을뽑는물레를만드는법을배울수있었다.
그기술을전국에보급하여국민들로하여금목화실을이용해衣服(의복)을만들어입게하였다.그런점에서선생은정천익과더불어목화종자의도입,시험재배의성공,종자의전국적보급,목화실을이용한의복의제조등에서절대적인공을세운과학자였다.

▲문익점선생묘©박태선기자

文益漸(문익점)墓(묘):경상남도기념물제66호

자는日新(일신),호는三憂堂(삼우당).본관은南平(남평).
공민왕9년(1360)문과급제하고金海府司錄(김해부사록).諄諭博士(순유박사)등을지냈다.

70살을일기로파란만장한생을마감한문익점은생전에나라가진흥하지못하고성인의학문이제대로전해지지못하며,자신의뜻이확립되지못한세가지점이걱정된다는뜻에서자신의호를‘三憂堂(삼우당)’으로지어불렀다.

▲삼우당문익점선생묘비©박태선기자 ▲묘소옆전경©박태선기자

사각형으로만들어진선생의묘는床石(상석)과碑(비),좌우의文人石(문인석)과望柱石(망주석),石燈(석등)등이비교적완벽하게갖추어져있어고려시대墓制(묘제)연구에좋은자료이다.

▲도천서원,신안사재전경©박태선기자

유적지를돌아보며많은사람들이원나라를오가면서도무심했던목화씨를헐벗은백성을생각하고몰래가져오신선생님의마음을느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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