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랑교실에서 보낸 국민학교 시절’
[나와6·25]1학년은박부잣집대청마루,6학년은정자나무밑에서수업 ‘유랑교실에서보낸국민학교시절’
칠판하나와분필이전부…비바람몰아치면옷젖어
짚·풀로덮고가마니깔고나중에임시학교지어
노주원(67·부산북구)

내고향은지리산자락에있는경남산청군단계면.전쟁이터졌을때나는단계국민학교1학년이었다.학교에서돌아오니온동네사람들이피란을간다고야단이었다.우리가족도40리정도떨어진고모댁으로가뒷산대밭에굴을파고피란살이를시작했다.굴속에서는바깥에서작은소리만나도숨을죽이고바닥에엎드려있기만했다.우리는훈련이잘돼있었다.그러나세살배기여동생은밤낮으로울기일쑤였고,정말난감했다.어머니는여동생입을틀어막고,우리는굴입구를가마니로가렸다.

두달정도굴속생활을하는데외할아버지가찾아와"인민군이어린아이들과노인들은잡아가지않으니아이들은집으로오라"고했다.아버지와어머니,16살누나는굴속에남고형과나만집으로돌아왔다.집에와서도우리는마당에2평남짓한방공호를만들어무슨소리만나면무조건들어갔다.

시간이흐르면서나와또래친구들은그런상황에익숙해졌다.인민군도빨치산도별로무섭지않았다.총과실탄·수류탄등무기를주워서모으는것을재밌다고생각했다.폭격이나총소리가나면일단숨었다가기관총소리가많이났던곳에잽싸게달려가기관총탄피와실탄연결고리를주웠다.비행기폭격소리에도익숙해졌고,뛰고엎드리고지형·지물을이용해숨는요령도군인못지않게터득해갔다.총소리만듣고도아군인지,적군인지알수있을정도였다.

동네가인민군치하에놓인지3개월정도흐른어느날온동네가시끌시끌해졌다.인민군이후퇴하고경찰이다시돌아왔다고했다.한동안보이지않던동네어른들과형들이다시활보하기시작했다.우리는학교도다시다니게됐다.하지만학교건물은이미불타버리고없었다.아이들은잿더미속에서타다남은못과유리창이녹아구슬처럼된유리알을주워서’못치기’와’구슬치기’를하면서놀았다.

학교선생님들까지동네로돌아오고,학교수업을다시시작한다고했다.학교가불에타버린상황에서동네에서부자(富者)였던몇몇어른들이자신들의집을흔쾌히교실로제공했다.우리는학년별로공부할장소를나눴다.학년이낮을수록좋은환경에서공부할수있었다.1학년은박부잣집대청마루,2학년은권부잣집대청마루,3학년은정부잣집대청마루,6학년은북단하천둑에있는정자나무밑에서공부를했다.우리는이교실을’유랑교실(流浪敎室)’이라고불렀다.유랑교실에는칠판하나와선생님이가져온분필이전부였다.여름에비바람이몰아치면바깥쪽에앉은아이들은옷이젖었다.겨울철에는차가운마룻바닥때문에엉덩이가시려참을수가없을정도였다.쉬는시간엔햇볕이잘드는양지쪽에벽을등지고옹기종기모여서손을비비며몸을녹였다.밤이면같은반아이들끼리모여등잔불밑에서같이숙제를하기도했다.

1953년3월에찍은단계국민학교3학년수료기념사진.가운데둥근원안에있는소년이노주원씨,사진오른쪽화살표가가리키는곳이초가지붕과흙벽으로된가교사(假校舍)의모습./노주원씨제공

교실없이떠도는자식들이안쓰러웠던지부모들이자발적으로옛학교자리에’가교사(假校舍)’를짓기시작했다.산에서나무를베어기둥을세우고,벽은대나무를엮어흙으로바르고,지붕에는짚과풀로덮은임시학교였다.바닥에는가마니를깔고,출입구와창문은거적때기로적당히가렸다.우리는교실에서공부를할수있다는것이너무기뻐어쩔줄몰랐다.그러나비가오면지붕에서물이흘러칠판이젖고,공책도젖어찢어지기일쑤였다.

우리동네는전쟁이끝난후에도빨치산활동이끊이지않았다.학교로가는길목담벼락에는늘빨치산들의사진과이름이적혀있는벽보가붙어있었다.매일같이벽보앞을지나다니면서아직토벌하지못한빨치산들의이름을줄줄외우고다녔다.구구단은못외워도빨치산이름을못외우는아이들은없었다.경찰서앞을지날때는공비들시체를거적때기로적당히덮어놓은것을흔히볼수있었다.

내가국민학교4학년때전쟁은끝났지만우리는국민학교를졸업할때까지유랑교실과가교사를전전했다.정부에서시멘트가조금나왔지만학교를짓기엔턱없이부족했다.전쟁이끝나고매일하교시간이될무렵이면학교를짓기위해전교생이냇가에서모래와자갈을퍼다날랐다.시멘트와모래를섞어’시멘트벽돌’을틀에넣어찍어내고,시멘트기왓장도선생님통솔하에어린우리들이직접만들었다.새로지은학교가완성되기전에나는졸업했지만전쟁때불타버린학교를다시세워지금까지졸업생을배출하고있다는게너무나자랑스럽다.나는당시유랑교실시절받은학업우수상,개근상,정근상등을하나도빠짐없이간직하고있다.이미빛바랜것들이지만내겐보물보다더소중하다.

나는육군중령으로예편한후부산의동아대에서강의를했다.지금은정년퇴직을하고손녀보는재미에살고있다.초등학교에다니는손녀에게옛날이야기를해주면그저웃기만할뿐믿으려하지않는다.유랑교실에서함께공부했던친구들과두달에한번부산에서모임을갖는다.일흔을앞둔친구들과모여옛날이야기를할때면우린어느새수십년전유랑교실시절로돌아간다.

조선일보기사201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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