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거지 국밥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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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햇살이 눈부시다.
전철을 타고 시내로 들어가는데 창밖으로 북한산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이달 말이면 북한산에도 단풍이 온다는 뉴스 앵커의 한 마디가 귓전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교보문고에 들러 우물쭈물하다가 좀 늦었다.
영화 상영까지는 20분밖에 안 남았는데 점심을 걸러서 배가 고프다.
상영시간이 긴 영화여서 무엇인가 먹어야 할 터인데 극장 주변에 별로 먹을 만한
곳이 없다.
순대 아니면 돼지고기로 만든 음식들로 냄새를 풍겨 싸대서 비위에 거슬릴 뿐이다.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실버극장에 가다가 생긴 일이다.
맨 끝자락에 국밥집이 하나 보인다.
초라하기로 치면 50년대 시장골목에나 있던 국밥집 같다.
문 앞에 걸려 있는 양은가마솥이 하도 커서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지름이 1m는 되고도 남는 대형 양은솥이다.
무쇠 솥이 큰 거야 당연하지만 양은솥이 이렇게 큰 건 처음 봤다.
그 큰솥에 우거짓국이 찰랑대리만치 담겨 있다.
음식점이 후지기는 해도 시간이 없으니 어쩌랴 들어서고 말았다.

통나무 테이블이 일고여덟 개는 있는데 빈 테이블이 없다.
아주머닌지 할머닌지가 턱으로 가리키며 합석하라고 한다.
이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주로 바디 랭귀지로 통한다.
하도 많은 사람이 드나드니 똑같은 말 반복하기도 싫다는 눈치다.
손님들도 그러려니 하고 군소리 없이 다들 고분고분 잘 따라 한다.
손님이 먹기를 거의 다 끝내가는 것 같은 테이블에 염치불구하고 합석했다.
앉기가 무섭게 국하고 밥을 내동댕이치듯 놓고 간다. 맥도널드보다 빠르게 나온다.
이 모든 동작이 말 한마디 없이 자동으로 이뤄지는 무언의 식당이다.
뚝배기에 담긴 국에는 기름 한 방울 떠 있지 않은 우거지 맑은 된장국이다.
일단 한 숟갈 떠서 국 맛을 봤다. 맛이 괜찮다. 음 이거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밥을 말아서 먹었는데 시골 장터 국밥 그 맛이다.
우거지 배추를 푹 고았지만 우거지심이 씹힐 만큼 살아있다. 담백한 엷은 된장국
맛이 그만이다.
뼈다귀를 우려냈는지 고기도 한 점 없는데, 한 방울 기름도 뜨지 않았으면서도
구수하다.

양은솥 크기에 놀랐고, 맛에 놀랐다. 그리고 음식 값에 놀랐다. 단돈 2천 원이다.
세상에 2천 원짜리 국밥이 서울 도시 한복판에 있다니?
주인아주머닌지, 할머닌지 먹으려면 먹고, 말라면 그만둬라 식으로 대해도 꾸역꾸역
기어드는 손님들이 왜 그러는지 이해가 간다.
나를 몇 번씩 놀라게 해주는 음식점은 처음이다.

그리고 이틀쯤 지났다.
나는 플라스틱 빈 통을 검정 비닐에 싸 들고 국밥집으로 향했다.
미국에서는 음식점에서 먹다 남은 음식은 싸 가지고 가는 것이 예사로운 일이다.
미국에서 짜장면을 시킬 때면, 면 따로 짜장 따로 달라고 부탁한다.
사실 면에 비해서 짜장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짜장 반은 싸서 가지고 온다.
한국에서는 먹다 남은 음식을 싸서 가지고 가는 사람이 별로 없다.
남은 음식을 싸서 달라기에는 치사하다는 생각이 들던가, 아니면 음식량이 너무
적어서 남는 게 없어서일 것이다. 그보다는 눈치가 보여서 그러는 것 같다.
나는 미국에서 오래 살다보니 미국 아이들처럼 눈치라는 걸 잃어버렸다.
내가 좋은 대로, 내게 득이 되는 대로 산다.
일산에 나와 있을 때면 혼자이니 음식 해 먹는 일도 고역이다.
해서 착안해낸 아이디어인데
국밥을 시켜 먹으면서 할머니더러 국밥 한 그릇 더 달라고 했다.
한 그릇은 싸 가지고 가서 다음 날 먹을 요량이다.
할머니는 내가 국밥을 먹으면서 또 달라고 하니 이해가 안 가는지 처다만 보고 있다.
말은 안 하고 바디 랭귀지로 통하는 할머니인지라 못 알아들었나 해서 다시 한 번
부탁했다.
할머니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소주 한 병을 꺼내 들고 온다.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고 플라스틱 통을 보여주면서 여기에다가 담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래도 내가 왜 국밥을 더 달라는지 이해가 안 가는 모양이다.
다른 테이블에 앉아있던 손님들이 할머니의 이해를 거들어 준다.
그제야 국 한 그릇을 떠 왔다. 국만 가져오면 뭐하나 나는 밥이 모자라는 것 같아서
밥도 달라고 했다.
이번에는 밥을 비닐봉지에 싸서 가지고 왔다. 밥은 이 자리에서 먹어 치우고 국만
가지고 갈 터인데 비닐봉지에 싸 오다니.
그러면서도 무엇이 할머니를 당당하게 만드는지 알 수 없었다.
아! 이 할머니 모르면 물어보면 어디 덧나나? 말없이 엇박자만 처대는 어색함이란!
식당에서 비닐봉지 밥을 털어먹는 희한한 경험도 했다.

할머니는 무심하다. 마음이 비어있다. 손님이 드나들든 말든, 말을 걸어오든 말든,
돈이 벌리든 말든, 그저 국 맛이 나느냐, 안 나느냐 이것뿐인 것처럼 보였다.
밀봉된 플라스틱 통을 검정 비닐봉지에 싸 들고 전철을 탔다.
스스로도 구적 진 인생 같아 보였다.
그러면서 지갑이 두둑하면서도 내 입맛은 왜 이리 싸구려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 Comments

  1. journeyman

    2016년 10월 18일 at 5:28 오후

    피자 같은 경우는 남은 조각을 싸오지만
    다른 음식은 그럴 생각조차 못했는데
    좋은 생각으로 보입니다.

  2. 비풍초

    2016년 10월 26일 at 11:22 오전

    그 식당갈려면 어떻게 가야하는지요? 위치라든가 전화번호 알려주실수 있는지요.. 2천원이라니 그 가격에 어떤 맛인지 저도 맛보고 싶어지네요.. 국수한그룻에 2,800원짜리라든가 김밥 1줄에 1,800원짜리는 봤어도 국밥2천원은 아직 맛을 못봤네요.. ㅎㅎ

    가격불문하고 맛있는 거 찾는 재미도 있겠지만, 가격이란 조건을 하나 더 붙여서 맛을 찾는 재미는 더 쏠쏠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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