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산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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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에는 외사촌 누님이 사신다.
팔십 사세라고 해도 정정하기가 옛날 육십 사세 같다.
매형 밥해 대느라고 늙을 새가 없다고 한다.
정말 세상일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모 내는 딸만 셋이었다. 사촌 누님이 쌍둥이였는데 맏언니였다.
밑으로 쌍둥이 동생하고 막냇동생이 있었다.
젊어서는 지금 외사촌 누님만 빼놓고 모두 건강해서 팔팔 날아다닐 정도였다.
누님은 몸이 약해서 골골했다. 어디 가나 누워 있어야만 했고 보약을 달고 살았다.
쌍둥이 동생은 시집가서 첫애 낳다가 죽었고 막냇동생도 죽은 지 오래됐다.
골골하던 외사촌 누님만 아직도 싱싱하게 살아 계시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일전에 점심으로 떡국을 끊여주기에 먹으면서
“지금 세상 너나없이 구십을 넘겨 사는데 누님도 구십은 넘기셔야지요.” 했더니
“그럴까?” 하시면서도 웃으시는 모습이 당연하다는 듯해 보였다.
젊어 건강, 늙어 건강 따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좋은 세상 일찍 죽은 사람만 억울하다.
나의 작은 누님 기일이 돼서 형제들 모두 산소에 다녀왔다.
엊그제인 줄 알았는데 벌써 5년이 지났다.
점심으로 뷔페를 먹으면서 몇 살까지 살 것이냐는 말이 오갔다.
노인 건강은 먹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두 접시 세 접시쯤 갈아치우면 건강하다는 징조다
큰 누님이 맨 날 골골대면서 잘 걷지도 못하더니 점점 건강이 좋아진다.
어디로 여행 갈까만 연구하더니 타고 다니는 차를 새 차로 바꾸겠단다.
지금 칠십 구 세인데 얼마나 더 살 것 같으냐고 물었다.
구십은 살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새 차로 바꿀 만도 하다고들 했다.
옆에 있던 형님은 얼마나 더 살 것 같으냐고 했더니 팔십 오 세까지야
살지 않겠느냐고 한다.
내가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내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나는 장인어른이 팔십 삼세에 돌아가셨고, 장모님도 같은 연세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나도 팔십 삼세를 죽을 나이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딱 십 년 남았기에 나름대로 준비를 해 가고 있었다.
점심 먹으면서 윗분들의 속내를 듣고 보니 막내인 나야말로 상향조정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향조정이 행복한 일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건강이 따라줄는지 그게 문제인데
세상일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어서 내일 아침 안녕하기만 바랄 뿐이다.

오래 산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맛을 대표하는 주자는 달콤함일 것이다. 그렇다고 설탕만 먹고 살 수는 없다.
고기 맛이 좋다고 해서 고기만 먹고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동물은 스스로 먹잇감을 얻지 못하면 그날로 죽고 만다.
인간도 스스로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하는 날이 생명의 끝이어야 하지만,
지금은 먹잇감으로 따지지 않는다.
스스로 추스를 수 있느냐 하는 잣대가 기다리고 있다.
장수가 무엇인지 장수보다 더 귀한 선물은 없는 것 같다.
천국을 믿는다고 부르짖는 사람도 스스로 천국에 가기는 원치 않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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