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그친 저녁나절 야산에 오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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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도 비, 그제도 비 금년에는 비 사태가 났다.
사월도 막바지로 치닫는데 아직도 비가 온다.
키만 비쩍 자란 불루 딕스(Blue Dicks)가 지난겨울 비가 얼마나 오래도록 왔는지를
말해 주고 있다.
뉴스에서 시에라 산맥에 눈이 많이 와서 여름 7월에도 스키를 즐길 수 있다고 한다.
정말 엄청 많이 왔다.
지난 겨우 내내 아스팔트길이 빗물에 파이고 상처투성이다.
길바닥 땜질하는데 돈이 많이 들어갈 것이라며 세금을 올리기로 했다니 별일이 다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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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산에 풀이 정강이를 넘어 허벅지까지 자랐다.
야생화도 거센 풀의 득세에 못 이겨 겨우 얼굴 내밀기도 버겁다.
루핀 부채꽃(Silver Lupine)이 줄기만 자랐지 꽃이 제대로 영글지 못했다.
작년에 폈던 캘리포니아 퍼피(California Poppy), 그 자리에 또 피었다.
풀이 극성스럽게 자라면서 꽃이 제구실을 할 수 없게 훼방 논다.
풀이라고 해서 같은 풀이 매년 자라는 것도 아니다.
그해, 그해 기후에 따라 각기 다른 풀들이 자란다.
사오 년 전에 극성을 부리던 풀이 금년에 다시 나타나 활개 친다.
풀도 오래간만에 만나보니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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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새귀꽃(Mule’s Ears)도 지금이 한철이다.
군데군데 무리지어 피어 있는 것이 일 년 만에 만났다고 반가워한다.
잊고 지내다가 만나서일까? 노새귀꽃이 나의 미소를 끌어낸다.
어제 기억보다 일 년 전 기억이 더 선명한 것은
만남의 기쁨이 그만큼 소중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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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나절 언덕길을 따라 초원을 걷는 것도 지금이 적시다.
싱그러운 풀냄새도 지금 맡아야 한다.
일주일을 못 넘기고 누렇게 변색하리니, 초원의 녹색은 금세 사라지고 말리라.
세월 다 보내고 나서야 터득한 후회스러운 나의 삶이 떠오른다.
풀밭 능성이 아름답게 보이는 까닭은 곧 이별이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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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세상 만난 풀들에게 짓눌려 하늘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야생화가
노숙자처럼 쪼그리고 앉아 처분만 기다리고 있다.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면 문학은 억압받고 핍박받는 소외자의 이야기일진대
나는 오늘 야생화를 위해 포커스를 맞추겠다.
꽃들아, 참고 기다리면 다 지나가리니. 오늘만 날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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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짜기에 물 흐르는 소리도 경쾌하다.
수량이 많아 한 옥타브 올려 부르는 감미로운 합창이 천상의 소리 같다.
봄기운을 쐰 새들이 목이 쉬도록 소리 지른다.
나 여기 있다고, 너 아니면 죽겠다고…….
물가의 두꺼비도 끄르륵 트림을 토해내 존재감을 드러낸다.
봄은 정녕 천지를 요동시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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