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꽃 동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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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에도 진달래꽃은 봄에 피었고 천 년이 지난 지금도 진달래꽃은 봄에 핀다.
세월이 빨리 돌아간다고 해서 진달래꽃이 일월에 피지는 않는다.
까발려진 세상에 누가 소식을 느려터지게 기다리고 있겠느냐만, 진달래꽃이 피기까지는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한 겨울 긴 동면을 겪고 나야 진정한 꽃의 아름다움이 나타난다.

꽃은 선택의 자유가 없다.
피고 지는 것도 그렇고 꽃을 피워야할 장소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
인간의 삶이 스스로 창조해 가는 것임에 비하면
꽃은 선택되기만을 기다리는 서글픈 운명이다.
그렇다고 꽃에서 서글픈 표정은 읽을 수 없다.
꽃은 선택 받기 위해서 온갖 아양을 다 떤다.
아양 떠는 꽃을 미워할 사람 누가 있겠는가?

한번 지고나면 말 짧은 생을 선택의 여신 앞에 불사르고 만다.
아마 불사르는 삶이어서 아름다운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도 불사르는 삶이 아름답다.
신명나게 타오르는 삶처럼 아름다운 삶이 어디 있겠는가?
꽃처럼 불타는 생을 살다 간 사람들은 모두 아름답다.

인간이란 자연의 일부이기도 하지만, 자기의식을 갖춘 존재다.
더욱이 한국인은 마음(心)을 가진 존재이다.
한국인의 마음은 인(仁)이 핵심을 이룬다.
어질 仁, 자애로울 仁, 사랑스러울 仁인 것이다.
결국, 전통적 인본주의의 계승인데,
불쌍한 것을 보면 측은한 마음이 생기는 것이 한국인의 마음이다.

꽃에도 영혼이 있다.
아니 혼(魂:넋)보다는 오로지 영(靈)뿐이다. 영과 백(魄:형체)이 존재한다.
정신까지야 말할 수 없지만 단순한 영은 존재한다.
산에서 본 진달래꽃은 나를 따라와 내 기억 속에 머물고 있다.
꽃의 영이 고정 되어 있는 영상이 아니라 바람에 흔들리는 영상으로
돌아가신 내 어머니와 함께 나타난다.
천경자 화백의 꽃을 든 여인처럼 그렇게 나타나 존재감을 과시한다.
어찌 꽃에게 영이 없다 하겠는가?

진달래꽃 잎 따서 먹어본다.
아무 맛도 없다. 무(無)맛이 맛인 진달래꽃을 소년은 많이도 먹었다.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는 진달래꽃을 혹시나 배부르지 않을까 잔뜩 먹었다.
입술이며 입안이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부케처럼 한 묶음 꺾어들고 집으로 가면서도 먹었다.
꽃으로는 배가 부를 수 없다는 것을 경험으로 터득하던 소년.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산에는 진달래꽃 박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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