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가 뒷마당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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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마당에 여우가 나타났다.
여우가 내 눈에 띄기로는 이번이 두 번째다. 캘리포니아 회색 여우다.
여우는 야생동물이어서 덩치가 작아도 섬뜩하다.
가까이에서 마주하기는 처음이다.
초조하지만 오래도록 머물기를 바라는 엉뚱한 마음은 왜 생겨날까?
나는 살며시 집안으로 들어가 이층에서 카메라를 꺼냈다.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늘어지게 낮잠을 자려는 모양이다.
햇볕 따스한 양지쪽에 앉아 오수를 즐긴다.

나는 첫눈에 알아봤다. 저것이 여우라는 사실을.
몰래 아내를 불러 보라고 했다. 아내는 라쿤(너구리 과)이라고 했다.
라쿤은 집 마루 밑이나 천장으로 들어가서 들쑤시고 다녀서 라쿤이
한 번 살고 나가면 집을 수리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망쳐놓는다.
사람들이 집에 라쿤이 얼씬 거리는 것을 싫어하는 이유다.
라쿤은 야행성 동물이다. 밤에 나타나 사람을 놀라게도 하고 집에 구멍만 있으면
들어가서 난장판을 만들고 다닌다.

그러나 이자는 여우다.
수일 전에도 한번 보기는 했다. 그러나 확신할 수 없어서 여우같은 동물이 뒷마당에
왔다 갔다고 했더니 아내는 여우가 아니라고 우겼다. 개나 고양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안다. 분명 개나 고양이는 물론 아니었고 라쿤도 아니라는 사실을.

주둥이와 꼬리를 보고 여우라는 걸 금방 알아차렸다.
여우는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그러나 몸집이 날렵하게 생겼으면서도 쳐다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동물을 잡아먹고 사는 야성이 그대로 살아있다.

6.25 휴전을 앞두고 돈암동에서 동대문시장엘 가려면 한성여고 옆으로 펼쳐진 능선을
따라 창신동 고개를 넘어 걸어가야 했다.
그때만 해도 능선을 따라 여우가 꽤 있었다. 밤이면 여우 우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어려서 잘 몰랐지만, 할머니가 여우 우는소리라고 했다.

능선을 따라가다 보면 산소가 많이 있었는데 여우가 산소에 구멍을 뚫고 들어가
시체를 뜯어먹는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에는 사람도 먹을 게 없어서 굶어 죽는 판인데 여우라고 해서
먹을 게 있을 리 만무하다. 여우도 오죽했으면 사람 사체를 먹었겠는가?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여우는 산소에 구멍 두 개를 뚫는다.
엑스트라 구멍은 언제든지 도망갈 채비를 해 놓고 어두운 구멍으로 들어가겠다는
계산에서다. 여우는 그만큼 약은 동물이다.
여우를 사냥할 때는 한쪽 구멍에 자루를 씌워놓고 다른 구멍으로 연기를 들여보내면
숨이 막히는 여우가 도망가려고 튀다가 자루 속으로 뛰어들어 잡히고 만다.
예전에는 여우 목도리라는 게 있어서 부잣집 여인들이 목에 감고 다녔다.
여우 목도리는 털이 달린 여우 가죽이지만, 주둥이부터 꼬리까지 통짜로 살려 냈기
때문에 여우의 생생한 모습이 고대로 드러나 있었다.

오늘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여우를 보았다.
비록 야생에서 사는 동물이지만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회색 털로 잘 단장한 몸매가
멋을 한껏 부린 애완동물 같다.
특히 긴꼬리에 털이 풍성하면서 짙은 검은색이 조선기와의 추녀처럼 치켜들고
그 밑으로 엷은 털이 덥수룩하지만 반지르르한 꼬리가 매력적이다.
과연 여우꼬리는 탐이 날 만큼 토실토실해 보였다.
날카로운 주둥이와 예리한 눈빛도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여우가 뒷마당 텃밭에서 햇볕을 즐긴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흥분되기도 했다.
조금이라도 더 머물기를 바랐지만, 여우는 그렇게 많은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무엇에 쫒기는 것도 아니면서 여우처럼 가 버렸다.
마치 약속이나 하고 헤어진 것처럼 나는 다음 만날 날을 기다린다.
아름다운 여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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