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사는 남자 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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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노인은 혼자 살아가기에 힘들고 어렵다고들 한다.
캐나다에서 사는 친구가 아내와 사별하고, 근래에 지병으로 고생하던 아들도 죽고
말았다. 이제 혼자 남았다.
나만큼 늙었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나보다 젊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이 목소리는 여전히 찌릉찌릉 울린다.
그러면서도 밥 한 솥 해놓고 일주일을 먹는다고 하더니 이젠 채소만 먹는단다.

가끔 전화 통화를 한다.
“야, 밥이라도 해주는 마누라를 구해야 할 것 아니냐?”
“마누라는 해서 뭐해, 혼자 사니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그래도 늘그막에 누가 옆에 있어야 의지가 될 것 아니냐? 큰 집에 덩그러니 혼자
살 수는 없잖아?”
“다 필요 없어, 갈 때 되면 가야지”

그래도 그렇지 남자 노인이 어찌 혼자 살 수 있단 말인가?
더러는 그렇게 살기도 한다지만, 내 생각으로는 옆에서 보살펴 주는 사람이 있으면
당연히 더 오래 살 뿐만 아니라 삶의 질도 월등 나을 것이다.
최소한도 밥 한 솥 해놓고 일주일을 먹지는 않을 것 아닌가.
혼자 살지 않으려면 여자를 구해야 할 텐데 오히려 내가 더 걱정된다.
늙어서 결혼하자면 걸림돌도 많다. 자식, 재산, 수입, 건강 여러 가지 따져보고
정리해야 할 게 많다.
골치 아픈 문제들이 있어서 선뜻 결정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보다도 내가 더 걱정하는 까닭은 이 친구가 젊어서부터 너무 숙맥이기 때문이다.
겉보기와 말하는 것 들어봐서는 안 그런 것 같아서 사람들은 모른다.
그러나 속내를 알고 보면 막상 여자 앞에서는 갈피를 못 잡을 정도로 불안해한다.
공대에 다닐 때 급우가 여동생을 소개해 준일이 있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내 형님이 아직도 결혼을 못하고 있으니 형을 소개해 드리면
어떻겠느냐“고 물어보았단다. 즉석에서 딱지맞았다.
자신은 결혼도 순서가 있어서 그렇게 물어본 것뿐이라지만, 여자가 듣기에는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더냐.
이제 살 만큼 다 살았으니 안 그럴 것 같지만 천성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여자 이야기만 꺼내면 질색을 한다.

두 번, 세 번 전화하다 보니 이 친구가 전혀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나는 내가 사는 지역에 결혼상담소가 있는데 거기에다 물어보면 어떻겠냐고 했다.
구태여 멀리 알아볼 게 뭐가 있느냐면서 자신이 사는 지역에도 여자는 많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도 할망구인 주제에 송장 치르려고 늙은 홀아비를 맞겠느냐고 한단다.
내가 들어도 기분 나쁘게 들린다.
하지만 마음을 들어 내놓지 못하는 한국 할머니의 자존심이 그런 식으로 표출되는
소리겠지 그걸 정말로 믿으면 어떻게 하는가?

그렇다면 한국에서 구해보지 그러느냐고 했다.
한국에서 데려온 여자들은 캐나다 생활이 지루하고 따분해서 견뎌내지 못하고
결국 재산 다 우려먹고 돌아가는 거 여러 번 봤다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것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다 그런 것도 아니다.
늙으면 의심만 남는다더니 옛말이 틀린 것 하나도 없다.

늘그막에 여자 얼굴만 보지 말고 마음을 보라고 했다.
마음이 진국이면 됐지 더 바랄 게 뭐 있겠느냐고도 했다.
하지만 마음이 겉으로 보이는 것도 아니고 길게 지내보지 않고 어찌 알 수 있단
말인가?
진심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더냐.
기억할 수 없으리만치 아주 오래 같이 살아온 내 아내도 때로는 속마음을 안다고
할 수 없다. “날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아내를 볼 때마다 죽는 날까지 터득하지
못하는 게 여자의 마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도대체 진심을 안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그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망막한 젊은이들에게나 중요한 문제가 아닐까?
노인에게도 중요하다고?
내가 보기에는 운명인지, 팔자인지 하는 소관에 맡겨놓고 살아야 하는 게
맞다하겠다.
운명이나 팔자가 무엇인가?
미리 정해진 필연적인 법칙에 따라 일어나므로 인간의 의지로는
변경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정해진 대로 살자, 생긴 대로 살라는 말이다.

전화통화 끝머리에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말은 피뜩 던진다.
다니는 교회 목사가 추천하는 자기 어머니를 위시해서 과부 할머니들도 있다고 한다.
이런저런 말이 들려온다고도 했다.
친구의 심성으로 미루어 보건대 들려오는 소리에 관심을 기우리기보다는 신경이
쓰여서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으로 조마조마해 하는 꼴이 보지 않아도 뻔하다.

박완서의 단편 ‘그리움을 위하여’에 나오는 외딴섬 사랑도의 홀아비 선주를
바라보던 섬마을 과부들이 생각난다.
하나같이 검게 탄 얼굴에 주름살이 밭고랑처럼 나 있는 과부들이 혹시 나데려가지
않을까하고 홀아비 선주만 바라본다.
십 년은 젊어 보이는 피부도 뽀얀 여자가 서울에서 내려왔으니 섬마을 과부들이
얼마나 기분 상했겠는가?
칠십도 넘은 교장 선생님 같은 홀아비 선주는 서울에서 온 젊은 과부라도 꿰 찾지만,
내 친구는 그럴만한 주변머리도 없다.
차라리 현실이 소설처럼 돼 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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