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번 출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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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번 출구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출구가 공사 중이어서 폐쇄돼 있다.
손목을 꺾어 시간을 확인했다.
8번 출구로 약속 장소가 바뀌었음을 알려 주었다.
을지로 4가 전철역에서의 일이다.

중구 구청 앞에서 왼쪽으로 돌아 조금 내려가면 오장동 함흥냉면이 있고
코너에 흥남집이 있다.
한참 기다렸다. 주문 받고 돈부터 걷어간다. 그리고도 남의 테이블에 끼어 앉았다.

84세 사촌 누님과의 데이트다.
내가 부탁했던 ‘현대문학 6월호’를 건네받고 누님이 부탁한 마그네시움 두 병을 드렸다.
현대문학 6월호에는 2017년 신인추천작이 실려 있어서 내가 원했던 것이고
마그네시움은 의사 선생님이 노령인 누님에게 먹으라고 해서 내게 부탁했던 보조제다.

평양냉면은 메밀로 만들고 함흥냉면은 전분으로 만들기 때문에 질긴 걸로 알고 있다.
오늘 우리는 함흥 집이 아닌 흥남 집에서 함흥냉면을 먹어서 그런지 조금 덜 질기다.
흥남은 함흥보다 남쪽이어서 덜 질긴가? 계란 파동으로 반쪽짜리 삶은 계란도 없다.
누님은 맛이 별로라고 했지만 나는 그래도 맛있다.
다만 먹기가 무섭게 쫓겨나서 그렇지!

걸어서 중부시장으로 들어섰다. 시장이 옛날 같지 않아 깨끗하고 널찍하고 천장도
시원스럽게 높다.
건어물이 지천이어서 누님은 멸치를 샀다.
명태알이 많아서 놀랬고 값이 싸서 놀랐다.
어제 저녁 연신내 시장에서 본 명태알 가격에 비하면 이곳에서는 반값이다.
너무 싼 것 같아서 덥석 사고 말았는데 막상 사고 보니 너무 많아서 다 먹어치울 일이
망막하다. 일단 얼려놓긴 했는데 혼자서 어떻게 다 소비할지 걱정이 태산이다.

누님은 어려서 어느 형제들보다도 건강이 약해서 골골했다.
앉아 있을 힘조차 없어서 가는 곳마다 누워 있어야 했다.
그러나 형제 누구보다도 오래 사신다. 본인 스스로도 놀란다.
문제는 골골해서 오래 못살고 죽을 줄 알았던 누님이 가장 오래 살고 있다는 사실.
이 빅뉴스를 걱정만 하시던 웃어른들에게 보여주고 싶은데 이미 다들 돌아가셔서
보여줄 사람이 없다는 게 안타깝다고 해서 웃었다.

결과는 오랜 시간이 흐른 다음에 나타나기 마련인데 결과가 나타날 때쯤이면
기대했던 사람들은 다 가고 없다.
보여주면 기뻐하고 칭찬해줄 사람들은 이미 이 세상에 없다.

그렇다고 나이 어린 자식들에게 오래 살았다고 자랑해 봐야 먹혀들어갈 리 만무하다.
그래서들 빨리 성공하려고 서두르는 모양이다. 빨리빨리 문화도 그래서 탄생했고…..

아무도 지켜봐 주는 이 없어보여도 꼭 그렇지만은 않다.
마음속으로 어디선가 보고 계실 거라고 믿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마음은 어디서 생겨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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