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들은 전철만 타면 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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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 양배추를 사러 연신내 시장에 갔다.
내가 알고 있는 가게 한 곳이 가장 저렴하기 때문이다.
홈플러스나 동네 가게에서는 1/4 조각으로 나눠놓고 비닐로 포장했다는 이유만으로
천오백 원을 받는다.
그러나 내가 아는 연신내 시장 채소 가게에서는 한 통에 삼천 원이다.
반값에 불과하다. 그것 때문에 먼 연신내 시장으로 전철을 타면서까지 간다.

오후 한 시가 넘어서다.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한국 젊은이들이 얼마나 양보에 인색한 가를.
양보에 인색하기는 여자나 남자나 다를 바 없다.
달리는 차 앞으로 끼어들까봐 틈을 주지 않는다.
일차선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깜박이를 켜놓고 누가 양보해 주려나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도 들어오라고 양보해 주는 사람은 없다.
앞에서 젊은이들끼리 걸어온다. 내가 똑바로 걸어가다가는 부대끼게 생겼다.
결국 내가 비껴야지 양보를 기대한다면 여지없이 부대끼고 만다.
해 볼 테면 해 봐라다.
양보에 인색한 젊은이들도 전철에서만은 예외다.
노인석을 침범하는 일은 없다.

노인석에 앉아 있는 내 옆에는 뼈만 남은 것처럼 보이는 할머니가 앉았다.
손에는 전철 카드를 들고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다.
내가 다 불안하다. 저러다가 카드 잃어버리지 하는 염려 때문이다.
조금 있다가 내게로 폭 쓰러졌다.
앞자리에 앉아 보고 있던 할머니 세 분이 깔깔대고 웃는다.
잠에서 깨어나 상황을 판단한 할머니가 어제저녁에 잠을 못 자서 그렇다고
웃으면서 변명한다.

시장에는 먹고 싶은 게 많다.
호박꽃도 똑똑해서 꽃술에 꿀 칠을 해 놓고 벌을 꼬시듯이 반찬 가게도
먹음직스럽게 해 놓는 게 손님 꼬시는 방법이다.
반찬 중에 가장 싼 무채 뭍임 하나 이천 원에 샀다.
생선전이 먹고 싶어도 지난번에 가시 골라내느라고 애먹던 생각이 나서 그만뒀다.
동그랑땡 전이라고 하는 것도 있는데 지난번에 먹으면서 이 고기가 먹을 만한
고기로 만든 건지 어떤지 괜한 의심이 들어 이번에는 그만두기로 했다.
보라색 양배추를 뭐라고 부르느냐고 물어보았다. 적채라고 한단다.
오다가 금세 잊어버릴 것 같아서 비닐봉지 겉에다가 적채라고 써 달라고 했다.

적채 두 덩어리, 무채, 달걀 한 타를 들고 오느라고 팔죽지가 늘어나는 줄 알았다.
경노여서 전철은 공짜라고 하지만, 돈 오천 원 아끼려고 시간 없애면서 멀리까지
가서 사 올만한 가치가 있느냐? 물어올 수도 있다.
그러나 싸게 살 수도 있는데 구태여 돈 더 주고 사면 기분이 안 좋다.
돈으로 치면 별것 아니지만, 기분으로 치면 별거다.
기분에 죽고 기분에 산다고 했다. 나는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기분을 중요시 한다.
아침에 일어나 기분 좋으면 온종일 기분 좋다.
다 늙은 나이에 누가 날 기분 좋게 해 주겠는가?
젊은 날처럼 기분 좋아 친구 술도 사주고 여급 팁도 주던 날도 있기는 있었다.
노인은 감정이 일 년에 8%씩 감소해 간다고 한다. 메말라 간다는 말이다.
조그만 기분이라도 살릴 수 있다면 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가는 이유다.
오는 길에 옆에 또 바짝 마른 할머니가 얼굴을 다 가리고 눈만 빠끔 내놓는
커다란 마스크를 쓰고 졸고 앉아 있다.
여지없이 내게로 쓰려지려다가 바로 서기를 반복한다.
앞에 앉아 있는 노인들도 모두 눈을 감고 있다.
노인들은 밤에 제대로 잠을 못 자서 그러나 전철만 타면 존다.
아니면 영원히 졸아버릴 연습을 하는 건가?

1 Comment

  1. 데레사

    2017년 9월 15일 at 6:21 오후

    대개 노인들은 불면증을 앓고 있거든요.
    그리고 묘한게 흔들리는 곳에 앉으면 자기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오고요.
    제가 좀 그렇거든요. ㅎ
    그러나 저는 그 도깨비같은 마스크는 절대 사절입니다.
    무섭기도 하고 기괴하기도 해서 영 마음에 안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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