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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달이 휘영청 밝다.
전깃불 없는 시골이라면 보름달이 제구실을 하겠건만, 전기 없는 시골이 없으니
달도 스스로 안타깝고 야속하리라.
옛날에는 달빛에 책 읽고, 달빛에 밤길 걸었건만 그런 은공도 모르고 전깃불 밝다고
쳐다보지도 않는다.
인간이라는 것들이 밉살머리스럽지만, 그래도 너그러운 보름달은 보름달답게
엄청나게 크고 밝다.

추석에 성묘하러 갔다가 주워온 밤(Chestnut)을 어찌할 수 없어서 일단 삶았다.
때깔은 반지르르한 게 보기에 좋다만, 도토리 알만한 자질구레한 밤이 먹을 게 뭐가
있겠나 하면서도 버리기에는 아까워 그냥 삶았다.
오후가 돼서 출출하기에 뭐 좀 먹을 게 없나 하고 찾아보다가 삶아놓은 밤이 눈에 띈다.
창가에 앉아 추석 백두장사 씨름대회를 보면서 한 알 까서 먹었다. 그런대로 먹을 만하다.
껍질이 연해서 까기도 쉽고 잘 벗겨진다. 밤알 머리통을 벗기면 쉽게 홀 당 벗겨진다.
노란 속살이 통짜로 나온다. 작기는 해도 까먹기도 수월하고 맛이 괜찮다.
밤알이 작아서 땅콩 까먹듯 까서 먹고, 까서 먹기를 연달아 한다.
밤이 밤 같지 않아 우습게보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먹어보니 그게 아니다.
실제로 해 보지도 않고 지레짐작으로 안일 것이라고 속단하는 건 큰일 날 짓이라는 걸
새삼 느낀다.

친구 어머니가 생각난다. 오래전의 일이다.
친구가 어머니 미국 구경시켜드리겠다고 모셔 왔다.
한동안 친구네 집에서 머물렀다. 나도 자주 들러 문안 인사를 드렸다.
친구 어머니는 양평에 산소 자리를 사 두었다고 했다.
손주들이 자주 찾아오라고 산소자리 입구에 밤나무를 심었다고도 했다.
손주들이 밤 따 먹으러 올 거라고 하셨다.
그때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들어 넘겼다.
아마 혼자 누워 계시키 외로워서 손주라도 찾아오라고 그러시나보다 했다.
손주라고 맨 날 애들로 머물러 있는 게 아니다.
어른이 된 손자가 그까짓 밤 때문에 먼 산소에 자주 가겠나 하고 속으로 콧방귀도 켰다.
친구 어머니는 손자가 보고 싶어서 그런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나의 어머니는 손수 밤나무를 심지는 않았으나 자연스레 밤나무가 대여섯 그루 서 있다.
어떤 나무는 까마득하게 키가 크다.
해마다 밤이 떨어져 나뒹굴지만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관심도 두지 않았다.
산소 뒤편으로 어지르기만 한다고 불평만 늘어놓았다.
자질구레한 밤을 무엇에다 쓰겠나 했다.
이번에 처음으로 검정 비닐봉지에 서너 줌 담아왔다.

백두장사 씨름대회를 보면서 한 톨 한 톨 까먹다 보니 거의 다 먹었다.
까놓고 보면 노란 살이 토실토실한 게 먹음직스럽다.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실은 살아계신다.
돌아가셨으면서도 자식이 좋아할 밤을 챙겨 주신다는 걸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어리석은 자식은 오늘에서야 어머니가 주시는 밤이 라는 걸 알아차렸다.
나는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송편 갖다드리고, 어머니는 내가 좋아하는 꿀밤 주시고.
맛있는 밤이 그리워 빨리 다음 해 추석이 왔으면 하는 마음이 절로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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