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제 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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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 ‘새김 소리‘라는 도장 새기는 집에 들렀다.
서울에 도장 새기는 가게가 많기는 해도 옛날처럼 수제 도장집은 없다.
요새는 컴퓨터로 새기기 때문에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도장 기술이다.
사실 도장은 똑같아서는 안 된다. 개인 서명과 같아서 달라야만 한다.
그러나 컴퓨터로 새겨내는 도장은 똑같을 수밖에 없다.
수천 개를 새겨도 똑같이 만들 수 있는 컴퓨터 도장을 어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도장 문화에 의문이 생긴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한번 젖어 든 문화는 그리 쉽게 고쳐지지 않는 법이다.
누구라도 똑같이 만들 수 있는 도장인 줄 알면서도 그냥 쓰는 것이다.

오늘 내가 새기려는 도장은 용도가 좀 특이하다.
수주 전에도 들려 이미 어떤 도장으로 새길까 하고 점찍어놓은 모델이 있다.
주문해놓고 가서 저녁 먹고 오다가 찾아가란다.
하지만 그날은 보고만 왔다. 좀 두고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첫째 도장 새기는 가격이 만만치 않다.
1“x1″ 사각형 돌에 새기는 도장으로 7-8만 원이라고 한다.
너무 비싼 것 같아서 다른 곳은 없나 하고 돌아다녀 봤다.
올해만 해도 인사동에 두 군데 새로 생겨서 도장집이 세 군데나 된다.
가격은 다 같았고 품질이 아무래도 오래된 옛 도장 새기는 집이 낫지 싶다.
오늘 밤 큰맘 먹고 비싼 도장을 주문하기로 했다.

디자인과 이름을 적어줬다.
사십은 넘어 보이는 주인아주머니는 카드보다 현찰을 좋아할 것이다.
7만 원에 하기로 했다. 며칠 후에 들를 테니 천천히 만드셔도 된다고 말해 주었다.
아주머니는 며칠이면 내일이냐 모래냐 말하란다.
나오는 길에 들렀다가 안 됐다고 하면 다음에 또 와도 되니까 시간은 염려하지 말라고
말해 주었다. 사실 나는 인사동 길을 매일 나가다시피 한다.
도장이 당장 급한 것도 아니어서 자신 놓고 시간을 넉넉히 준 것이다.
아주머니는 알았다면서 그럼 다음에 와서 찾아가란다.
영수증을 달라고 했더니 현금으로 내면 영수증이 없단다.
그러면서 누가 자기 이름도 아닌 도장을 가져가겠느냐고 웃는다.
그러면 내가 와서 도장 달라는 데 돈 받은 일 없다고 하면 나는 어쩌란 말이냐?
그러지 말고 현금 받았다는 증서라도 써달라고 했다.
아주머니는 웃으면서 사람을 그렇게 못 믿느냐고 한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더니 ‘새김 소리 수제도장’ 명함을 꺼내 든다.
까만색 명함에 세련된 붉은 글씨로 상명이 적혀 있다.
검은색 볼펜으로 ‘7만 완납’이라고 쪼그맣게 적어 주었는데
그렇지 않아도 검은색인 명함에다가 검은색 볼펜으로 썼으니 글자가 보이지 않는다.
명함을 들고 불빛에 빗겨봐야 볼펜 자국이 보인다.
어떻게 보이든 아무튼 완납 증서를 받아 들었으니 마음이 놓인다.

가끔 한국 사람들이 뭐 그런 걸 가지고 그러느냐는 식으로 나올 때면 나는 당황한다.
그냥 넘어가지 뭘 그러느냐고 할 때도 당황한다.
장터에서 할머니가 펴놓고 있는 냉이가 싸서 2000원어치 사면 덤이 너무 많을 때
정말 당황한다.
아파트 모퉁이를 걸어가다 보면 시골 할머니가 길바닥에 채소를 놓고 판다.
장사하는 건지 아니면 동네 할머니와 신세타령을 하는 건지 앉아서 노닥인다.
상추 한 무더기에 2000원이란다.
너무 많은 것 같아서 반만 살 수는 없느냐고 웃으면서 물어보았다.
안 팔면 말았지 그렇게는 안 된단다. 나머지 반은 누가 사 가겠느냐는 거다.
옆에서 보고 있던 동에 할머니는 머리가 금방 돌아간다.
“2000원에 사서 나하고 반씩 나눕시다.”
이게 다 한국식으로 살아가는 방식이다.

다시 도장 이야기로 돌아가서,
알라딘 중고 서점에 책을 25권이나 내다 팔아 7만 원을 받았다.
받은 돈 7만 원으로 도장 하나 새긴 것이다.
내가 거금을 들여 도장을 새기는 이유는 간단하다.
오클랜드 시립도서관 동양인 분소에 책을 기증하기로 했는데
내게서 떠나는 책 뒷장 어느 구석에 도장이라도 찍어서 시집보내고 싶어서다.
어떤 의미가 있어서라기보다 떠나보내는 서운한 마음을 그렇게라도 달래보고 싶다.
다시 말해서 내가 이 책을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붉은 도장으로 말해주고 싶다.
누군가 책을 읽고 나서 도장의 흔적을 만나게 된다면 나의 이 애틋한 마음을
느끼는 사람도 있지 않겠나 하는 마음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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