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인생

사진은 거부해서 못 올립니다.

행복한 인생

아침에 잠에서 깨어 눈을 떠 본다. 일어나기에는 조금 이르다.
다시 눈을 감고 뜸을 들인다.
더는 잠이 올 리 없고 이런저런 생각이 책장 넘기듯 지나간다.
나는 이 시간이 하루 중에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뒤치락거리면서 지난밤 꾼 꿈을 되새겨본다.
꿈은 대개 새벽녘에 꾼다. 꾸고 나도 또렷하게 기억나는 꿈은 그리 많지 않다.
꿈에 생뚱맞게 외할머니가 보였는데 특별히 기억나는 건 없다.
엊그제 외사촌 누님을 만나 외할머니 이야기를 했더니 꿈에 나타나신 모양이다.
만날 수 없는 그리운 사람을 꿈에서라도 보게 된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짧지만 확실한 행복이다.

1.4 후퇴 때 밀려갔다가 다시 서울을 수복했을 때의 이야기다.
도강증이 있어야 한강을 건너 서울로 들어올 수 있었다.
어머니는 피난처 대구에 그냥 남았고 도강증이 없어도 강을 건널 수 있는
아이들만 먼저 서울 외할머니 집으로 돌아왔다.
외할머니는 갑자기 들이닥친 손주들 때문에 끼니 거리를 마련하느라고 돈암동 시장 입구에서
수수전병을 부쳐 파셨다.
나는 어린 마음에도 할머니 궐련이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꽁초를 주으러 다녔다.
그때는 담배 필터가 없던 시절이라 꽁초를 주어도 내용물이 그런대로 많이 남아 있었다.
저녁이면 화롯가에 둘러 앉아 할머니는 긴 장죽을 물고 뻐끔뻐끔 연기를 내뿜었다.
맛이 어떠냐고 물어보면 구수하다고 하셨다.
그런가 하고 나도 한 모금 빨았다가 쓰디쓴 맛에 콜록콜록 기침을 해 대며 뒤로
나자빠졌다.

백 년 전에 살았던 사람 하면 까마득한 역사 속의 인물처럼 들리지만
실은 나의 외할머니만 해도 백 년 전에는 젊은 꽃다운 청춘이었다.
외할머니는 18살에 가평에서 옷 바위로 시집오셨다.
우리말로 옷 바위를 일본 강점기 때 의암(衣岩)이라고 한자로 표기해서
지금 사람들은 의암이라고 알고 있다.
외할머니는 똑똑하셔서 혼자 한글을 깨치고 신문도 읽으셨다.
딸 넷에 막내로 아들 하나를 두셨는데 아들은 서울로 유학을 보냈다.
공부를 잘해서 서울대 의과대학에 다녔다.
방학으로 집에 올 때면 마포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 와 신년강을
거쳐 옷 바위까지 오곤 했다.
경춘선 철로가 개통하기 전이니까 김유정이 작가로 등단하던 시절이다.
그때는 강줄기가 고속도로를 대신하고 있었는데 마포에서 나룻배를 타고 춘천까지
사흘이나 걸렸다고 한다.
외사촌 누님은 그 광경을 이렇게 그렸다.
“같이 유학하던 여학생이 한 명 있었는데, 강을 따라 노 저어 가는 배에 두 사람이
타고 가는 심정이 어땠겠니? 그것도 달밤에 사흘씩이나….“
외사촌 누님은 늙었어도 여자여서 로맨스만 떠올린다.

외할머니 아들, 그러니까 나의 외삼촌은 방학 때 집에 와 있다가 장질부사에 걸려
몹시 열이 났다. 춘천 도립병원에 입원시켰다.
외할머니의 회상으로는 의사들이 열을 내리겠다고 어름 찜질을 해 대더란다.
열이 펄펄 끓는 아들에게 어름을 들여대니 사람이 살 수 있겠느냐고 했다.
아들의 죽음을 잘못된 의술 탓으로 돌렸다.
외할머니는 절에 가서 부처님께 열심히 빌었다. 상원사 큰 절에 가서 무릎이 닳도록
빌었다고 했다. 간절한 소망도 하염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아들이 죽고 난 다음 부처님도 별것 아니더라 하시면서 천주교로 개종하셨다.

외사촌 누님이 외할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은 누구보다 각별하다.
누님이 시집갈 때 외할머니는 어미 없는 외손녀가 불쌍해서 손수 이불을 지어
주셨다고 했다. 그때는 고마움을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면 가슴이 저민다고 누님은
몇 번이고 되 뇌였다.
돌이켜보면 외할머니는 불행한 인생이었다.
막내 외아들을 장질부사로 잃었지, 넷째 딸은 6.25 때 북으로 넘어가 생사조차 모르지,
둘째 딸은 서른다섯에 애 낳다가 죽었지, 셋째 딸은 일찌감치 과부가 됐지.
자식이 앞서 가거나 잘못되는 꼴을 보는 것은 악몽이다.
한 여자의 일생이 순탄하지 못하다는 것은 불행한 인생이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인생은 못 볼꼴 없는 인생이다.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지만 끝나는 날까지 못 볼꼴 안 보고 가는 게 삶을 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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