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의 수영 교습을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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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에게 요즈음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어보았다.
손주 실어다 주고 실어오는 게 일과란다.
나도 그러게 생겼다.
손자 녀석 여름 방학 동안의 스케줄은 지 엄마가 짠다.
나는 수영장에 데려다주고 데려 오는 걸 맡았다.
일주일에 4일간 월화수목이다.
오전 10시 15분부터 30분 동안 수영 교습을 받는 클래스다.

미국과 스페인 여자 월드컵 16강전이 생중계방송되는 시간이다.
전반전이 1:1로 막상막하다.
경기 시청을 놓치기에는 너무나 아쉬웠지만 손주를 데리고 수영장으로 향했다.
수영복으로 갈아입은 손주는 신이 났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후반전에서 승부가 가려질 장면은 아깝지만 포기해야 한다.

내비게이터에 주소를 입력하고 안내하는 여자 목소리를 따라 찾아간 곳은
고등학교 야외 수영장이다. 어린아이들 여러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넓은 수영장에 어린이 16명이 교습을 받는다. 수영 교관 한 사람이 4명씩 맡아 가르친다.
실력에 따라 구릅으로 나눠 가르치는 데 손주 녀석은 조금 할 줄 아는 아이들 구릅에
섞여 있다.
구릅이래야 4명 아이들 중에 손주가 제일 못한다.
팔을 쭉 뻗고 교관이 서 있는 곳까지 가야 하는데 잘하는 아이는 교관이 뒷걸음질 치면서
조금씩 거리를 늘려가는 식이다.
손주는 겨우 네다섯 번 팔을 내 저어 가는 정도여서 수영해 가는 거리가 짧다.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이런저런 교습을 받으러 다녀도 아내가 데리고 다녔지
나는 가보지 못했다.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했으니까 나는 죽어라 일만 했다.
지금 생각하면 같이 다녔다면 얼마나 좋은 추억거리로 남았을까 생각해 본다.
수영장 파라솔 그늘에 앉아 아이들이 물속에서 노는 걸 보고 있다.
수영 교습이라는 게 물속에서 노는 거지 별것이더냐.

아이들이 수영 교습을 받는 걸 보면서 내가 수영을 익히던 생각이 난다.
그때도 여름 방학이었다. 중학교 일 학년 때 교회 학생부에서 임진강 마당바위로 캠핑을
나갔다. 일주일 동안 강가에서 지내다 보니 스스로 수영을 터득했다.
터득한 다음 수영 선수들을 보면서 자세를 따라도 하고 다듬기도 했다.
그래도 그 실력으로 임진강을 수영해서 건넜다.
그때는 지금처럼 임진강에 철조망을 치지 않았던 때이다.
후일 소양강도, 한강도 수영해서 건너던 생각이 난다.

지금 손주가 수영 교습을 받는 것은 김치 담그는데 배추 몇 포기에 소금은 몇 그람,
고춧가루는 몇 그람 하는 식이다. 수영 교관이 전문 요리강사처럼 공식대로 가르친다.
내가 배운 수영은 어머니가 김치 담그던 것처럼 어림잡아 손에 잡히는 대로 넣고 얼버무리는
식이었다. 비과학적인 방법이다.
전문 요리 강사가 과학적으로 분석해서 김치를 담 갓 다고 한들 옛날 어머니가
담근 것 만 하겠는가.
어머니의 손맛으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딸 수는 없겠으나 메달이 대수냐.
사랑이 담긴 맛이면 그만이지.

수영도 메달을 노리는 선수가 아닐 바에야 스스로 즐길 수 있는 수준이면 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도 그렇다. 메달을 노리는 인생이 아니라면 스스로 행복한 수준에서 만족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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