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로 산티(Raffaello Sanz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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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라 산티는 1483년에 태어나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11살 때 아버지마저 잃었다.
신부인 숙부 밑에서 자랐다.
라파엘라 산티는 르네상스를 이끌어간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와 함께
3대 화가 중의 한 사람으로 37세에 요절한 이탈리아 천재 화가다.
17세에 페루지노 그림공방에서 수업했고, 페루지노의 기법을 익혀 스승을 뛰어넘어
공간처리와 환상적인 표현으로 신선미를 부각시켰다.
피렌체로 생활터전을 옮기면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명암법을 배워 페루지노 화풍을
벗어나 피렌체 화풍을 이어가면서 확립해 나갔다.
라파엘라 산티의 그림 세계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영향이 컸고 미켈란젤로의 기법을
선까지 모방하여 자신의 기법으로 소화시켜 재탄생시키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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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Formaria
라파엘로 산티 자화상을 보면 그가 얼마나 미남인지 알 수 있다.
그만큼 여성들로부터 인기도 많았다.
인기에 부합하듯 여성 편협도 많아서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으로 판단된다.
짧은 인생이나마 대외적으로는 독신으로 살았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무려 12년을 동거한 여인이 숨어 있다.
‘마르게리타 루티’라는 여인으로 ‘라 포르나리나’ 제빵집 딸이었다.
많은 작품의 성모 마리아 모델로 등장한 인물로 추정하고 있다.
사랑하면서도, 세간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동거 관계만 유지한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라파엘로 산티는 메디치 비비에나 추기경의 딸과 결혼이 추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세에는 추기경도 결혼이 가능했다.
뿐만 아니라 라파엘로 산티도 추기경 자리에 추천을 받은 상태였다.
(당시의 카토릭은 지금과는 다른 제도였다.)
높으신 추기경의 제안을 무시하고 미천한 계급인 제빵집 딸과 결혼 한다고 하기에는 무리였다.
결국 12년을 같이 살면서 결혼은 하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1520년 그가 죽은 다음 그의 스튜디오에 걸려 있던 초상화 한 점을 그의 조수 귀리오 로마니가 팔아 넘겼다. 수세기가 지난 다음 초상화의 여인이 ‘라 포르나리나’ 제빵집 딸,
‘마르게리타 루티’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라파엘로 산티의 여인인 것이다.
여인이 오른 쪽 팔에 차고 있는 밴드에 ‘RAPHAEL URBINAS’라는 화가의 사인이
쓰여 있다.

여인이 오른손으로 왼쪽 젖가슴의 유방암 혹을 드러내 보이는 것은 당시 고전적 사랑 표시이기도 하고,

달리 짐작해 보면 왼쪽 젖을 만지고 있는 것은 아기에게 젖을 먹여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아무튼 젖이 통통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당시로서 12년을 동거하면서 아기가 없었다고 보기에는 의문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 가지 던 희한한 것은 엑스레이 촬영 결과 그림의 보이지 않는 배경이 욕정과 사랑의 여신 비너스의

성스러운 ‘미틀’정원이다. 또한 반지가 덧칠되어 보이지 않는 것을 500년이 지난
2001년에서야 복원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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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방울새의 성모(Madonna del Cardellino)
아기 요한이 아기 예수에게 검은 방울새를 바치고 있다. 아기 예수가 잡고 있는 새는 하늘을 의미한다.

가시나무의 가시를 먹는다는 검은 방울새는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예수의 수난을 상징한다.
성모자 주제의 라파엘로 작품 중에서 가장 고전적인 풍미를 나타내는 그림이 방울새가
있는 이 성모자 작품이다.
구도면에서 성모가 화면 중심이 되어 있고 앉아 있는 모습이 안정감을 준다.
두 아기는 성모와 함께 삼각형의 구도를 형성함으로서 확실한 안정을 취하고 있다.
라파엘로 스스로 구축한 색채의 명암이 강하게 반영되어 인물이 명쾌하게 드러나 보일
뿐만아니라 통일된 색감으로 무리가 없다. 역시 라파엘로가 익혀온 부드러운 선이 절묘하게
묘사됨이 음악적 선율을 따라가듯 감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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