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낭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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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제2회 환자안전의 날 직원대상 환자안전 표어 공모전 당선작:
‘괜찮냐고 묻지말고 괜찮은지 살펴보자‘>
병원 로비에 걸려 있는 현수막

 

친구에게서 카톡이 왔다.
<나는 어제 4박 5일로 전립선 비대증 수술하려고 을지병원에 입원했다.
수술은 내일로 잡혀 있고 수술 받고 이틀 후에 퇴원 예정이다.
전립선 비대증 약을 9년이나 복용했는데 전립선이 커져서 이제는 수술해야 한다고 하더라.>
카톡을 받고 다른 친구들에게 병원을 방문해 보자고 이번에는 내가 카톡을 날렸다.
아무도 가겠다고 나서는 친구는 없다.
매일 집에만 있는 것도 따분해서 나 혼자라도 가 보기로 했다.
하계동 3번 출구로 나가면 을지병원이라는 것도 찾아냈다.
밖에 나다니다가 배라도 고프면 사 먹어야 할 텐데 혼자 사 먹는 것도 귀찮다.
아예 집에서 라면이라도 끓여서 점심으로 때우고 나섰다.
전철로 일산에서 하계동까지는 멀다. 한 시간도 넘게 걸렸지 싶다.
그래도 갈 때는 기대가 있어서 그리 지루하지는 않았다.

내가 구태여 친구를 방문하고자 하는 것은 전립선 비대증이라는 것을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증상이 어떠며 무슨 수술을 어떻게 하는 건지 겪어본 친구에게서 자세히
들어보고 싶어서다.
김훈의 소설 ‘화장’에서 전립선으로 고생하는 화자가 등장한다.
소변을 못 봐서 병원에 들러 주사기로 소변을 뽑아내는 장면이 나온다.
“어휴, 이렇게 되도록 어떻게 참으셨어요?” 하면서 간호사에게 지시한다.
간호사는 그 많은 소변을 주사기로 뽑아내고 있었다.
소변이라고 하는 게 수시로 나오는 건데 그걸 일일이 주사기로 뽑아낸다는
상상을 하면서 친구는 어떻게 했는지 직접 경험담을 듣고 싶었다.

3번 출구로 나왔는데 가는 비가 내린다. 우산을 펼까 말까 하다가 펴 들었다.
비 보다는 은행나무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우산을 펴 들길 잘했다고 알려 준다.
인도교에는 짓 노란 은행잎이 수북이 덮여 있어서 은행잎을 안 밟을 수가 없다.
은행잎만 있는 게 아니라 잘 익은 은행도 같이 밟힌다.
밟을 때마다 신발창 밑에서 은행열매 부서지는 소리가 우지직우지직 들린다.
기분 좋은 소리가 아니어서 발길 디딜 적마다 무슨 죄짓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무의 일 년 농사를 한 순간에 뭉개버리는 잔혹한 행위를 자행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한국에서 병원이라는 곳은 그게 그거다.
맥도널드 매장이 엇비슷하듯이 병원 로비도 그렇다.
안내 테이블에 다가가 물어보려고 했더니 아가씨는 전화통을 붙들고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옆에 경비원 아저씨가 앉아 있다가 무엇을 원하는지 묻는다.
내 이야기를 듣더니 환자에게 직접 전화를 걸란다.
나는 전화기를 안 들고 다니기 때문에 전화가 없다고 했다.
번호만 주면 자기가 걸어 주겠단다. 친구 전화번호도 없다.
“그러면 안 되지요. 이름만 가지고는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지금은 개인정보 보호
때문에…”
어쩌구 하면서 고개를 젓는다. 그래도 그렇지 방법이 없겠느냐고 했더니 자기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으니 원무부 고객상담실에 가서 잘 말하면 될 수도 있다고 친절히
가르쳐 준다.

원무부의 여직원은 나 같은 건 쳐다보지도 않고 귀찮다는 표정으로 실장에게 물어보란다.
실장인가 뭔가 하는 사람과 마주 앉았다.
앉으면 뭘 하나 들어볼 것도 없다는 식으로 도와줄 게 없단다.
친구와 전화 연결 좀 시켜줄 수 없겠느냐, 아니면 친구더러 로비로 나와 달라고 하면
안 되느냐고 사정사정해도 개인정보 보호 때문에 안 된다면서 볼일이 있으니 나가 달란다.
할 수 없이 그냥 돌아가기로 했다.
나오다가 친절한 경비 아저씨더러 “결국 못 보고 그냥 갑니다” 하고 인사나 했다.
친절한 사람은 말려도 친절한 법이다.
그러지 말고 3층에 올라가면 문이 잠겨있지만 문 앞에서 기다리다가 열고 나오는 사람이
있을 때 들어가면 된단다.
방마다 환자 이름이 적혀 있으니 금방 찾을 수 있다고 쉬운 방법을 가르쳐 준다.
날더러 도둑고양이 노릇을 하라는 거다.

차라리 그냥 가면 갔지 늙은이가 쎄배 들어갈 만큼 긴박한 일도 아닌데…….
다시 전철을 타고 땅속 긴 여행을 한다.
하늘 아래에서 달리는 것도 아니고 굴속을 달리는 여행은 아무것도 눈에 보이는 게
없으니 보고 배울 것도 없다.
지하철이 없던 시절에는 길 위를 달리면서 거리 구경도 하고 간판도 읽었는데,
사람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 했었다.
전철 안에도 사람은 많이 있지만 로봇처럼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이라 구경거리가 못된다.
무의미한 인생 낭비 같아서 현대문명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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