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 겪고 난 새 삶은 지난 날과 다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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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래스카 기류가 비까지는 아니지만, 강풍을 몰고 와 지난 밤 몹시 바람이 불었다.
밖이 어두워서 보이는 건 없지만 들리는 소리로 얼마나 강력한 바람인지 알 수 있었다.
밤이 지나면 강풍은 그칠 줄 알았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나의 예상은 팔 할이 빗나간다.
강풍인지 폭풍인지는 아침에도 끝일 줄 모르고 몰아쳤다.

뒷마당에 낫살 꽤나 먹은 오스트라리안 치즈 우드(Australian Cheese Wood)가 있다.
사시사철 푸르러서 좋은 점도 있지만 대신 잎이 많이 떨어진다.
병충해가 없어서 깨끗하기는 한데 일 년 내내 잎이 떨어져 지저분한 게 흠이다.
세찬 바람에 오스트리안 치즈 우드는 미친년 머리 날리듯 가지를 흔들어 잎을 털어냈다.
가지가 꺾어질 듯 말 듯 휘어졌다가 다시 일어서기를 수 없이 반복했다.
부러진 나뭇가지며 삭정이가 뒷마당에 나뒹군다.
햇볕은 따스하다만 쉴새 없이 불어대는 폭풍이 무엇인가 사고를 치고야 말 것 같다.

아닌 게 아니라 옆집 앞마당에 고목이 쓰러져 울타리가 다 넘어갔다.
고목은 쓰러지면서 가로등을 안고 넘어지는 바람에 쇠기둥으로 만든 가로등이 힘없이
쓰러졌다.
고목이 드라이브 웨이로 쓰러졌으니 망정이지 집으로 쓰러졌다면 집이 부서져도 많이
부서졌을 것이다.
바람이 불건 말건 일꾼을 불러 쓰러진 고목을 곧바로 베어내느라고 소란을 피운다.
베어내지 않으면 당장 차가 드나들 수 없기 때문이다.
바람은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여전히 요란하게 불어댔다.

드디어 결단이 나고 말았다.
오후 4시로 접어들면서 전기가 끊겼다. 우리 집만 끊어졌나 했더니 온 동네가 다 끊겼다.
PG&E에서 문자가 왔다. 395가구에 전기가 끊겼단다.
조금 기다리면 원상 복구가 될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내가 말했듯이 나의 예상은 늘 빗나간다.
밤늦도록 불은 들어오지 않았다. 깜깜한 집 안에 촛불을 밝혔다.
손전등을 들고 다닌다.
그러면서도 이웃을 걱정했다. 전기가 없으니 저녁을 어떻게 해 먹을 것인가?
우리는 먹다 남은 밥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저녁에 TV에서 아카데미 시상식을 보여줄 터인데, 그것도 ‘기생충’이냐 ‘1917’이냐 하는
막중한 씨름판을 볼 수 없다니…….
전기가 없으니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새벽 한 시가 넘어서야 불이 들어왔다.
아침에 TV 뉴스를 보니 거목이 전신 줄을 깔고 넘어진 사진을 보여준다.
전기가 끊겼다고 해서 우리에게 어떤 피해가 발생한 것은 아니지만, 정육점을 운영하는
마켓에서는 냉동 고기를 어떻게 감당했을까 내가 다 걱정이다.

하룻밤과 낮 동안 불어대던 폭풍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산뜻한 아침이다.
창밖으로 따스한 햇볕이 강풍 폭행을 뉘우치듯 오스트리안 치즈 우드를 감싸준다.
행복해하는 나무 밑에는 삭정이가 즐비하게 떨어져 있다.
강풍인지 폭풍인지가 삭정이를 떨구려는 자연의 몸부림이었나 보다.
삭정이를 다 떨어버린 나무는 새로운 삶의 도전에 나설 것이다.
헌 것은 버리고 새것으로 채우는 새로운 변화의 날들은 지난날과 다르리라.
사람이 겪는 시련도 나무와 같아서 겪고 난 새 삶은 지난날과 다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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