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선물

IMG_200-1-2 (3)

동네 한 바퀴 걸을 때마다 길에 떨어진 단풍잎을 집어 든다.

녹색이었던 잎이 빨갛게 혹은 노랗게 물든 잎을 보면 너무 예뻐서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색깔이 곱고 아름다운 잎을 줍는 날은 보석을 주운 것처럼 기분이 좋다.

다칠세라 조심스럽게 들고 와서 책상머리 벽에 붙여놓았다.

붙여놓으면 시들 때까지 한참 간다. 어떤 때는 2~3주도 간다.

나는 이런저런 단풍잎을 보면서 방에서도 가을을 즐긴다.

 

그냥 걸어갔다가 오는 것 보다 그나마 고운 단풍잎이라도 떨어진 게 있는지 살펴보며 걸으면

걷기가 한결 수월하다.

단풍잎을 주워들면서 알게 된 건데 단풍잎이라고 해서 다 집어 들게 되는 것도 아니다.

그중에서도 고운 색깔과 온전한 모양을 갖춘 단풍잎이라야 집어 들게 된다.

집어 든 다음에도 살펴본다. 간직할만한 건지 버려야 할 건지.

판단이 서기까지 짧은 순간이지만 진지하게 살펴보고, 만져보고, 고르는 판단의 칼날이

날카롭게 작용한다.

간직하기로 마음먹으면 그때부터 잎이 귀하게 보인다.

같은 잎인데 간직할 마음 없이 볼 때와 간직하기로 마음먹은 다음에 보는 잎은 귀하기가

천지 차이다.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인 것과 같다.

 

서서히 말라가는 단풍잎을 주의 깊게 관찰하다 보면 잎에도 굵은 핏줄이 있고 굵은 핏줄에서

뻗어 나오는 가는 실핏줄도 있다.

가는 실핏줄은 산지사방으로 흩어지면서 잎의 구석구석까지 이어진다.

잎의 생김새에 따라 가지런히 갈비뼈처럼 나타나는 핏줄이 있는가 하면 옛날 지도처럼

꼬불꼬불 골목길로 이어지는 것 같은 핏줄도 있다.

나뭇잎의 모양새가 다 다르듯 잎에 난 핏줄도 다 다르게 그려져 있다.

영양을 골고루 공급하기 위해 최적의 핏줄을 형성해 놓았을 것이다.

잎의 실핏줄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사람의 뇌에 분포되어 있는 핏줄을 보는 것 같다.

생로병사에서 보여주는 뇌조직에도 실핏줄이 나뭇잎처럼 뻗어있다.

핏줄을 통해 충분한 산소공급을 받는 뇌라야 기억력도 살아 숨 쉰다.

가을 잎사귀에서 우리의 뇌 속에 기억으로 새겨진 추억을 들여다본다.

 

그때도 늦가을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친구 넷이서 설악산 등산길에 나섰다.

서울에서 털털대는 버스를 타고 흙길을 달려 장수대까지 가는데 꼬박 하루해가 걸렸다.

장수대 김일성 별장에서 하룻밤을 잤다.

그때는 김일성 별장이라는 게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다음날 아침에 배낭을 메고 대승폭포에 올랐다.

늦가을에 돼서 물 한 방울 없는 폭포가 발라버린 단풍잎 같았다.

등산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는 어린 나이에 패기만 살아있어서 겁도 없이 무작정 덤벼들었던 것이다.

백담사를 향해 걷기 시작했는데 당시만 해도 지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는 것도 아닌데다가 경험이 있는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길을 잘못 들었다.

깊은 산속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길을 헤매는데 날은 왜 그리 빨리 어두워오는지.

이러다가는 안 되겠다 싶어서 무조건 계곡을 따라 하산하기로 했다.

계곡의 물줄기를 따라 내려가면 인가가 나올 거로 여겼다.

산속은 금세 어두워진다. 텐트를 치고 야영을 했다. 다음날도 계곡을 따라 내려오는데

계곡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짧은 폭포가 있고 폭포물이 떨어지는 곳에 커다란 탕이 있다.

마당만 한 크기의 탕은 물이 깊어서 짙은 녹색이었고, 녹색 탕은 온통 빨간 단풍잎을 가득 담고 있었다.

아름다운 탕을 뒤로하고 내려가면 그 보다 더 아름다운 탕이 나타났다. 폭포와 탕과,

폭포와 탕의 연속이었다.

반나절을 걸어서 마을에 내려와 우리가 지나온 계곡이 무슨 계곡이냐고 물어보았다.

십이선녀탕 계곡이란다. 얼떨결에 설악산의 명승지 십이선녀탕을 훑어 내려오게 된 것이다.

 

오늘 내가 주워 든 단풍잎이 그때 보았던 빨간 단풍잎과 비교가 되겠느냐 만은

단풍잎의 핏줄을 보면서 잊어버렸던 추억이 떠오르는 것을 단풍잎이 가져다주는

가을 선물이라고 해야 하나?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