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중앙일보에 실린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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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중앙일보에 실린 기사다.

코호트격리 요양병원 비명 이러다 다 죽는다, 제발 빼달라

오늘내일 중환자 병실로 이송하지 않으면 4~5명이 숨질 위험이 큽니다. 제발 환자 좀

빼내주세요.”

서울 구로구 미소들요양병원의 한 의료진은 27일 오후 간곡히 호소했다. 기자와 통화하기

1시간 전에 80대 환자가 숨졌다며 침통해했다. 사흘 전 이 환자를 위·중증 환자 리스트에

올려 이송을 촉구했지만 소용없었다. 그새 혈중 산소포화도(정상은 95 이상)와 혈압이

뚝뚝 떨어졌고, 소변이 나오지 않다가 끝내 숨졌다. 이 병원의 두 번째 사망이다.

 

몇 달 전에 출간한 나의 소설집 유학에 실린 코로나 19 팬데믹의 내용이 지금 막 한국에서 실현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내용 일부분을 소개한다.

 

                                                                                ******

 

남편한테서 열이 나는지 보름쯤 지나면서 죽이나 주스, 약같이 가벼운 음식도 먹는 족족 설사를 해 댔다. 설사만 하는 게 아니라 기침도 했다. 기침을 참지 못하고 연거푸 쏟아내는 것이었다. 겨우 진정되는가 하면 또다시 기침이 터져 나왔다. 그이는 혼자서는 일어서지도 못하고 겨우 일으켜 세우면 몇 걸음만 걸어도 숨이 차서 화장실에 가지도 못했다. 남편의 코로나19 증상이 심한데도 병원에서 치료조차 해 주지 않는 게 야속했다. 이런 식으로 코로나에 대처하는 게 맞는 건지, 의구심이 가시지 않았다.

LA에서 사는 막내 여동생에게 전화를 걸어서 좀 더 자세히 알아보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막내는 UCLA 간호학과 교수다. 다짜고짜 남편 이야기부터 털어놓았다.

? 그거 큰일 났네. 코로나바이러스가 고령에는 치명적인데. 우선 방을 따로 쓰고 언니는 마스크를 써야 해.

동생은 나를 걱정해서 감염되면 안 된다는 주의부터 주었다. 남편의 증세를 설명해 주고 증상이 이런데도 병원에서 입원시켜 주지 않으니 어쩌면 좋으냐고 물어보았다.

병원마다 입원 병동이 부족해서 그래. 산소 호흡 기며 장비도 없고, 의료진도 달리고, 지금은 병원마다 다 그래. 그래서 코로나19 환자를 가능하면 집에 머물게 하는 거야. 집에서 버티다가 나면 다행이고, 죽기 전에 입원시키기도 바쁘다니까?

나는 동생의 말을 듣고 뭐 이런 게 다 있어?’ 하는 생각이 들면서 마치 홀대받는 기분이 들었다.

. 그러면 어떻게 했으면 좋겠니?

그럴 경우, 구급차를 불러. 환자를 응급실로 밀고 들어가는 거야. 죽는다고 엄살을 떨어야지, 그냥 있으면 봐주지도 않아.

그래? 알았다.

나는 부아가 났다. 불현듯 각오 같은 게 생기면서 이를 꽉 물었다. 전화를 그냥 끊기가 뭐해서 동생네는 어떻게 지내는지 물었다.

요새 넌 어떻게 지내니?

LA도 자가 격리잖아. 학교에도 못 나가고 온라인으로 강의를 해야 해. 처음 해 보는 온라인 강의라서 실수투성이야. 직접 대면하지 못하니까 학생이 정말 알아들었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나중에 통화하기로 하고 급한 대로 남편이 갈아입을 내의를 비닐봉지에 담았다. 그리고 앰뷸런스를 불렀다.

마스크에 투명 안면 가리개를 쓰고 일회용 비닐 보호 복장으로 무장한 젊은 구급요원 둘이서 집 안으로 들어섰다. 남편을 들것에 눕히고 흔들리지 않게 위아래 두 곳을 단단히 조였다. 몸무게가 빠질 대로 빠진 남편을 가볍게 들고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앰뷸런스는 먼저 달리고 나는 차를 몰아 뒤따랐다.

응급실에 들어서자 보호복을 입은 의료진들이 남편을 곧바로 밀폐된 병실로 응급 침대를 밀고 들어갔다. 임시 병동이라고 했다. 의료진들은 남편을 만지고 싶어 하지도 않는 눈치였다. 아내인 내가 가까이에서 남편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도 주지 않았다. 기가 막혔다. 지금까지 나는 남편 곁에서 지냈는데, 여태까지 나 몰라라 하던 병원이 갑자기 야단법석을 피우다니? 나는 입원 서류를 작성하고 기다렸다. 어느 병동으로 들어가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입원실이 비지 않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점심을 걸렀는데도 배고픈 줄도 몰랐다. 자그마치 8시간을 기다린 다음 오후 늦게야 비로소 입원이 성사되었다. 그나마 입원이 되었다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누군가 죽어서 나가는 자리를 기다리느라고 늦었단다.

 

환자 방문 시간은 정해져 있었다. 오전 11~12, 오후 3~4시 사이에만 환자를 볼 수 있다. 나는 매일 하루에 두 차례씩 남편을 보러 갔다. 면회라고 해 봐야 고작 창문 너머로 병실에 누워 있는 남편을 바라보는 것이 전부였다. 비닐 호스 두 줄이 남편에게 이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줄을 통해서 영양을 공급받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간호사더러 남편한테 전해달라고 부탁하면서 스피커폰으로 돌려놓은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남편은 핸드폰을 받을 때면 늘 스피커폰으로 받곤 했었다. 핸드폰도 들어 올릴 기력이 없어서 베개 머리맡에 놓았다. 남편에게 핸드폰이 전해지면서 그나마 몇 마디 말이라도 나눌 수 있었다.

여보. 좀 어때요? 낫는 것 같아? 힘들어? 힘들어도 참고 이겨내야 해요. 힘내.

남편은 누운 채로 겨우 고개를 돌리고 눈만 껌벅이고 있었다. 그러더니 가늘고 힘없는 목소리로 겨우 한마디를 했다.

무서워.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매일 새로운 뉴스가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뉴스도 뉴스 나름이지, 남편과 나 같은 고령자에게는 목숨이 걸린 뉴스인 만큼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다. 코로나19 확진자 현황에 관심을 두게 된 것도 그래서였다. 오늘은 몇 명이 걸렸나. 몇 명이 죽었나. 한국은 어떤가. 이탈리아에선 몇 명이 더 발생했고, 몇 명이 죽었나. 뉴욕은 어떤가 하는 차트를 훑어보는 게 일상이 되었다. 훑어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기분 좋은 소식은 한 번도 듣지 못했다.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된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약이나 의료 시스템이 없어서 트럼프 대통령이나 캘리포니아 주지사나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역력해 보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치료 약 개발을 서두를 뿐 다른 대책은 못 내놓고,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자가 격리를 강조하면서 전염병에 걸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만 했다. 누구의 스피치를 들어봐도 딱히 석연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한국은 전염병에 관한 한 정말 잘 대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은 코로나바이러스에 상대적으로 안전한 나라다. 한국에서 코로나19 전염병에 걸리면 죽을 확률이 1.5%에 불과한데, 이탈리아에서 걸리면 8.5%로 껑충 뛴다. 미국 뉴욕은 확률이 더 높다.

 

남편이 병원에 입원한 지, 보름째 되는 날이다. 그이는 중환자실에서도 복도 끝에 있는 병실로 옮겼고 방에는 유리문이 겹겹으로 닫혀 있었다. 첫 번째 문 뒤에서 의료진은 얼굴 보호막과 보호 장비로 바꿔 입었다. 두 번째 문 뒤에 환자인 남편이 누워 있었다. 산소 호흡기가 그이의 얼굴을 감싸고 투명 플라스틱 줄이 얼기설기 뻗어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위중함을 알 수 있었다. 입원이 늦어진 게 치명적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간호사에게 환자와 핸드폰으로 말이라도 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스피커폰으로 돌려놓은 핸드폰을 간호사가 남편 베개 머리맡에 놓았다.

여보, 사랑해. 내가 사랑하는 거 알지? 힘내. 힘내야 이겨낼 수 있어. 빨리 일어나야 집에 오지.

그이는 아무 대답이 없다. 내가 하는 말을 들었는지, 어땠는지 표정이 변하지도 않았다. 그러던 남편이 겨우 뭐라고 했다. 옆에 서 있던 간호사가 고개를 숙여 귀를 그이의 얼굴에 대다시피 하고서야 알아듣는 것 같았다. 간호사가 그이의 말을 들려준다.

집에 가고 싶어.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울음을 억지로 참으면서 말하려 했으나 말이 되지 않았다. 겨우 한마디 했다.

사랑해, 많이.

복도 끝에서 면회 시간이 다 지나도록 서서 힘들어하는 남편을 지켜보았다. 딸은 이미 한 번 다녀갔기 때문에 아들에게만 아빠의 위중함을 알렸다. 아들은 토요일에 며느리와 함께 방문했다. 우리는 두 개의 유리문을 통해서 침대에 누워 있는 남편을 볼 수 있었다. 그이는 고개를 돌려 우리를 보았다. 열댓 발짝 벌어진 간격을 사이에 두고 아들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보였다. 힘내라는 표시였다. 그리고 수화로 하트를 그려 보였다. 남편은 아들을 알아보았는지, 어땠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그다음 날도 나는 남편을 보러 병원으로 출근했다. 사흘째 되던 날 나는 남편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이는 산소 호흡기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인공호흡기로 교체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간호사에게 따지듯이 물어보았다. 매사에 사무적인 간호사는 환자가 스스로 숨을 쉬지 못해서 장비를 바꿨다고 했다. 스스로 숨을 쉬지 못하다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무섭고 떨렸다.

 

5월인데 자고 일어났더니 비가 내린다. 비가 와도 조금이 아니다. 나는 캘리포니아에서 반세기를 살았어도 5월에 이렇게 많은 비가 오는 건 처음 보았다. 2층 서재에서 창문을 열고 뒷마당을 내려다보았다. 뒷마당 텃밭에 남편이 심어놓은 어린 채소들이 비를 맞으며 좋아한다.

우산을 쓰고 나가 보았다. 상추, 가지, 호박, 부추 그리고 시금치가 하늘에서 내리는 비 한 번 맞고 모두 좋아서 해맑은 얼굴을 짓고 있었다. 남편이 발병하기 전에 심어놓은 채소가 많이 자랐다. 직접 길러 먹자던 채소다. 채소는 먹음직스럽게 쑥쑥 자라는데, 진작 먹을 사람은 없다.

남편 면회하러 가려면 아직 3시간이나 남았다. 나는 아침을 먹고 갈 준비를 하려고 부엌으로 들어서는데 전화가 울린다. 화면에 뜬 번호가 병원이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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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내면서도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세인트 프랜시스 병원인데요, 환자분 부인 되시지요?

환자분이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단다. 심폐소생술이라니? 그렇다면 심장이 멎었다는 말이 아닌가? 나는 까무러칠 것처럼 놀라서 주저앉고 말았다. 수화기를 놓쳤는데 어디로 굴러떨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허둥지둥 병원을 향해 빗속을 달렸다.

안내 요원은 면회 시간이 아니어서 병실 방문이 허용되지 않는다고 가로막았다. 그러나 이것은 삶의 종말이 아니냐고 간청했다. 듣고 보니 사정이 딱해 보였는지 내 이마에 체온을 스캔해 보고 들여보낸다.

유리문을 통해 침대에 누워 있는 남편과 의료진의 허둥대는 모습이 보였다. 남편과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고, 남편 손을 잡을 수도 없다는 냉혹한 현실에 가슴이 저며 왔다. 두 눈에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입술을 깨물었다. 남편과 같이 산 40년 세월이 이렇게 허망하게 끝나다니.

진작에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집에서 죽게 내버려 둘 걸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한국에서 오지 말라고 할 걸 하는 후회도 일어났다.

유리창 너머로 심장 모니터 화면의 그래프 물결이 느리게 내려가는 장면을 지켜보면서 심장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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