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색 운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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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에 맞춰 신발도 어울려야 한다.

구두를 신어야 하는 옷도 있고 운동화를 신어야 하는 옷도 있다.

신발장을 들여다보았다. 구두가 세 켤레, 운동화가 두 켤레, 등산화가 두 켤레 있다.

구두를 언제 신어보았는지 기억에 없다.

, 수년 전 조카딸 결혼식 때 신어보곤 그만이다.

조카딸은 벌써 애가 셋이나 되니 5년도 넘었을 것이다.

나는 구두 신는다는 걸 까맣게 잊고 살았다.

신발장을 들여다보니 구두가 있어서 구두를 언제 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도 발에 꿰어보지도 않는 구두가 세 켤레씩이나 되다니 차라리 운동화가 세 켤레였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지금은 운동화 시대다. 너나없이 운동화만 신고 다닌다.

구두는 세일즈 맨이나 신을까? 우선 구두를 신으면 자유롭지 못하다.

걸음걸이도 자유롭지 못하고, 울퉁불퉁한 흙길은 밟기 싫다. 약간 구속된 기분이다.

운동화를 신으면 자유롭다. 날아갈 것 같다.

엊그제 문산장에 가면서 전철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서 있는 사람은 없었고 모두 자리에 앉아 있었다.

구두 신은 사람이 있나 하고 훑어보았다.

구두 신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종로로 나가는 지하철도 그렇다.

앞에 일곱 명이 앉아 있는데 모두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중 네 사람은 흰색 운동화를 신었고 두 명은 검은색, 아주머니는 엷은 핑크색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운동화 중에서는 흰색 운동화가 가장 화려하고 고급 같고 사치스럽다.

연예인들이 흰색 구두를 신고 무대에 서는 것과 같다.

유행에 민감한 젊은이들에게 흰색 운동화는 패숀에 속한다.

흰색 운동화이면서 새 운동화를 신으면 정말 산뜻하고 신선하고 고급스러워 보인다.

청바지에 흰색 운동화를 신고 스타벅스 커피를 들고 걸어가는 젊은이의 모습은

청순하고 현대 감각이 물씬 풍기면서 활기차 보인다.

하지만 흰색 운동화의 수명은 짧아서 보통 한 달 신으면 지저분해 보인다.

조금만 더러워지면 누추해 보인다. 거지 같다.

이건 검정 운동화만도 못해 보인다.

 

한국에서 흰색 운동화가 대중화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거리가 깨끗해졌다는 이야기다.

온종일 걸어도 흙을 밟지 않아도 되는 지금의 도시는 깨끗한 도시 맞다.

그래도 인파가 많아서 복작대는 거리를 걷다 보면 흰색 운동화엔 쉽게 때가 묻기 마련이다.

길바닥이 아무리 깨끗하다고 해도 걸으면 먼지가 나는 것도 사실이다.

먼지 속에서 흰색 운동화는 때도 잘 타고 얼마 못 가서 더러워진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이 흰색 운동화를 고집하는 까닭은 멋져 보이기 위해서다.

젊은이들이야 기분에 살고 기분에 죽는 건데 흰색 운동화를 신으면 멋져 보인다는데

그까짓 문제점 때문에 마다할 이유가 없다.

 

나야말로 젊어서부터 흰색 운동화만 신었다. 여기서 젊어서란 말은 30대 때를 말한다.

흰색 운동화 중에서도 리보크만 신었다.

명품 운동화로 나이키, 아디다스, 뉴바란스, 시그네쳐 등 부지기수지만 나는 리보크가

마음에 들어서 리보크만 신었다. 그것도 흰색으로.

조금 비싸더라도 리보크만 고집했고, 리보크에 집착했다는 것은 자기도취에 빠져있었다는

이야기이다.

흰색 운동화를 빨아가면서 신어도 보고, 흰 염색약을 발라 가면서 신기도 했다.

흰색 운동화를 신기에는 까다롭고 번거러웠지만, 그래도 흰색을 고집한 까닭은 흰색이어야

멋이 나기 때문이었다.

흰색 운동화, 새 신을 신으면 남들이 다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본다고 착각했었다.

 

우리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 개를 기르고 싶다고 해서 반여동물 숍에서

코컬 스페니올 강아지를 350달러나 주고 사 온 적이 있다.

아이들 더러 강아지 이름을 지으라고 했더니 리보크라고 지었다.

내가 리보크만 줄기차게 신었더니 아이들이 강아지 이름까지 리보크라고 지었다.

리보크는 우리 집에서 13년간 사랑받다가 죽었다.

코컬 스페니올 리보크와의 작별만이 오래된 게 아니라 흰색 리보크 운동화와도 작별한지

오래다.

늙다보니 구태여 리보크가 아니더라도 흰색 운동화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생각도 따라

늙었다. 늙으면 매사 진지하게 보이지 않고 시시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좋아했고 신세를 진 리보크 운동화가 시대에 따라 거들떠보지도 않게

되었으니 생각해 보면 찬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리보크가 보기에 배은망덕하다 할 것 같은 생각에 쓴웃음이 절로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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