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소설 연재 ‘탁란(托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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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란(托卵)

1.

샌프란시스코 유니온 광장 맞은편, 프란시스 호텔 2층의 클록 바로 들어섰다. 금빛 커튼이 드리운 창가 테이블에 앉아 있는 현아를 금방 알아보았다. 현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활짝 웃는 얼굴로 두 손을 내민다.

오랜만이야. 얼마 만이지?

반가운 나머지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들떠 있다. 현아를 가볍게 안고 등을 토닥였다.

칠 년 좀 넘었나 봐.

벌써? 세월 참 빠르네. 샌프란시스코엔 언제 왔어?

어제.

발그레 달아오른 현아에게서 하얀 이가 드러나 보였다. 현아는 벌써 보드카 마티니로 두 잔째란다. 내 것으로 피나콜라다를 주문했다.

어떻게 지내? 사는 게 재미있어?

현아가 밝은 목소리로 묻는다.

바빠. 맨날.

쉬는 날도 없이 일만 해?

일주일에 칠일.

주말도 없다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현아가 물었다.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현아와 헤어지고 처음 얼마 동안은 연락이 닿았으나 어느 날 아무런 이유도 없이 연락이 뚝 끊겨버려 그립고 답답했다. 그러나 그런 그리움도 세월 따라 차츰 흐려지면서 희미해져 갔다.

현아는 그동안 재혼했다가 이혼했다면서 네 살 먹은 아이가 있단다. 심란해서 샌프란시스코를 찾은 거라면서 이번 이혼은 성격 차이 때문이라고 했다. 결혼과 이혼을 가볍게 생각하는 현아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사는지 겉으로 봐서는 알 수 없었다.

5월의 노을이 오래도록 창가에 머물러 있었다. 현아와 함께 3층 오크룸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겼다. 저녁을 먹으면서 현아가 말했다.

네가 사는 모습을 보고 싶어. 보여줄 수 있어?

애는 안 보고 싶고?

애와 같이 살아?

아니, 스티브는 할머니가 기르고 있어.

스티브? 학교에 다니겠네?

현아가 자신이 낳은 아이를 보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엄마이기를 거부하더니 결국 아이가 궁금하지도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아는 보드카 마티니 두 잔을 더 마셨다. 현아가 변한 건 술 마시는 솜씨뿐이다.

 

2.

대학을 졸업하고 그렇게도 그리던 곳이자 태어난 나라인 한국에 가 보고 싶어서 원어민 교사에 지원했다. 분당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인천공항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모두 검은 머리에 나를 닮은 사람들이 우글거려서 놀랐다. 한국은 처음이었지만, 낯설기보다는 오히려 편안하고 포근한 느낌이었다.

생후 6개월 만에 캘리포니아 머데스토의 농촌 마을로 입양되어 간 나는 한국에 대한 기억이 없다. 소년 시절에는 나와 부모님이 다르게 생겼다는 것 때문에 방황했다. 키도 작고 까무잡잡한 외모에 외까풀 눈이 늘 자신감을 앗아갔다. 툭하면 방문을 닫고 혼자 지냈다. 불도 켜지 않고 어디서 왔나? 누구일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슬프고 우울해했다. 그럴 때마다 톰슨 어머니는 조용히 다가와 안아주면서 사랑한다고 다독여 주었다. 어머니의 진심 어린 사랑은 병아리들이 즐기는 봄볕처럼 따스했다. 햇볕을 나누어주는 태양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톰슨 어머니의 사랑은 어린 나의 온몸을 녹이고 감싸주었다.

너는 내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야. 누가 뭐래도 나는 너를 사랑해(You are my only son. No matter what anyone says, I love you).

톰슨 어머니는 이마를 내 이마에 대고 비비며 속삭였다. 그럴 때면 양어머니일망정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자신감을 불러일으켰다. 어머니의 사랑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학교 성적도 덩달아 올라갔다. 대학에서 언어학을 전공하면서 언어 감각에 특출난 재능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영어 교사로 한국에 오면서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한국어 배우기, 한국문화 체험하기에 관심을 가지고 푹 빠져들었다.

내가 현아를 처음 만나던 날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가을이었다. 을씨년스러운 거리에 흠뻑 젖은 플라타너스 잎이 시멘트 바닥에 스티커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발로 차도 꿈적도 하지 않는 게 떨어지기 싫어서 떼쓰는 아이 같았다.

빗속을 걸어 학교에 가면서도 한국어 단어를 외웠다. ‘뒤치다꺼리’, ‘움츠리다’, ‘개구쟁이등 한국어는 갈수록 어려웠다. 내 혓바닥이 꼬였는지 발음부터 어려워 혀를 펴느라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한 마디라도 배우려고 애쓰는 나를 지켜보던 영어 학습반 학부모가 현아를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학교에서 조금 나가면 있는 사거리 코너의 스타벅스에서 소개받을 여자를 기다렸다. 창밖엔 가을비가 멎었다 내렸다 했다. 노란 국화 한 송이를 테이블 위에 놓고 기다리면 여자가 올 거라고 했다. 기다리는 동안 초조해서 못 견딜 것 같았다. 젊은 여자 둘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유심히 살펴보았으나 내게로 오는 여자는 아니었다. 다음은 청년이 들어왔고 남녀가 나갔다. 문은 바쁘게 열리고 닫혔으나 내가 기다리는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초조하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해서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처음 뵙겠습니다.”를 몇 번이고 연습했다. 시간은 흐르고 사람들은 쉴 새 없이 들고 나는데 그 여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오기로 한 시간보다 삼십 분은 족히 더 기다렸을 것이다.

누군가가 내 앞에 서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눈을 떠 보았다. 오래 기다렸느냐면서 자리에 앉는다. 나는 벌떡 일어나 처음 뵙겠습니다.” 하고 고개 숙여 인사했다. 다행히 말실수 없이 잘 이어져 나왔다. 속으로 만족했다.

앞에 앉아 있는 여자를 보는 순간, 그만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이렇게 예쁜 여자는 처음 보았다. 천사가 나타났나 했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현아만 바라보았다. 현아가 커피를 시켜야 하지 않느냐고 묻지 않았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그냥 굳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긴 만남은 아니었지만, 입이 열리지 않아 현아가 하는 말만 듣다가 말았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두 번, , 금 오후에 만나 한국어를 가르쳐 주기로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매일 만났다.

마음이 들떠서 그런지 현아를 만나고 난 날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현아의 얼굴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진주알이 굴러가는 것 같은 목소리며, 웃을 때마다 보이는 흰 이빨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현아는 내가 하는 한국말이 어색하고 어눌할 때마다 교정해 주고 새로운 단어를 가르쳐 주느라고 말끝마다 끼어들었지만, 그게 싫지 않았다. 무작정 현아가 좋아 비 오는 날의 플라타너스 잎처럼 현아에게 찰싹 달라붙어서 떨어질 줄 몰랐다.

처음 사귀는 이성 친구여서 마음이 한껏 부풀어 있었다. 현아를 보기만 해도 웃음이 헤퍼졌고 더없이 즐겁기만 했다. 말이 많아지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어쩌면 현아는 내게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짝사랑이어도 현아가 좋았다.

유난히도 흰 이가 드러나 보이는 현아는 나보다 두 살이나 많았으나 그녀의 갸름한 얼굴 덕분에 오히려 두 살 아래로 보였다. 허름한 진에 제이크루 티가 잘 어울려 생동감이 넘쳐났다.

그녀는 질투심이 누구보다 강했다. 같이 길을 가다가 맞은편 여자에게 눈길이라도 줄라치면 현아는 그 여자를 쏘아보면서 자신과 비교해 보는 것 같았다. 상대 여자를 판단하는 데는 5초도 안 걸렸다. 대충 훑어보고는 곧바로 자신이 낫다고 단정해버려 비교할 가치를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예쁘다는 자긍심이 몸에 배어 있었다.

현아의 이러한 행동은 나를 상대로 하여 나타나기도 했다. 한 번은 드라마 촬영장을 지나갈 때였다. 탤런트가 예쁘기도 하지만, 처음 보는 촬영장이어서 넋을 놓고 지켜보았다. 현아는 그런 나를 버려두고 혼자 가버린 일도 있다. 질투심만 강한 게 아니라 이기심도 많아서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남들의 시선 따위는 개의치 않았다.

얼마 남지 않은 체류 기간을 연장할까 고민하다가 현아에게 물어보았다.

체류 기간이 다 돼서 연장할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현아는 잠시 수심에 잠기는 듯하더니 결혼하자면서 엄마 집에서 벗어나 나와 함께 가고 싶다고 했다. 깜짝 놀라 !” 하는 비명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것을 참느라고 입이 반은 벌어졌다. 그러지 않아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지만 입양아인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서 망설이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결혼하자는 바람에 온 세상이 내 것인 양 기쁘고 행복했다. 벅찬 가슴에 그 자리에서 미국 톰슨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큰 소리로 웃으면서 소식을 알렸다. 어머니는 나보다 더 기뻐했다.

한껏 들떠 있는 내게 현아가 느닷없이 임신이라고 했다. 흠칫 놀랐고 어리벙벙하면서도 갑작스럽게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현아는 아기를 낳고 싶지 않다면서 지우겠다고 했다. 아무런 책임감도 없는지, 거리낌 없이 내뱉는 현아의 말 한마디에 나는 겁이 덜컥 났다. 자리를 현아 곁으로 옮겨 앉아 어깨를 감싸 안아주었다. 가정을 꾸민다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하고 책임감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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