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꽃 사랑

IMG_10-3

나는 아침밥을 먹을 때면 창가에 앉아서 뒤뜰을 내다본다.

뒤뜰에 가지, 호박, 오이, 토마토를 심어놓고 작은 싹이 자라는 모습을 보면 행복하다.

호박과 오이는 씨를 뿌려 싹을 틔웠고 가지와 토마토는 모종을 사다가 심었다.

인생을 살면서 여러 가지 행복을 느끼겠지만 그중에서도 어린것이 자라나는 모습을

지켜보는 행복이 가장 보람되고 흐뭇하다.

한해살이 식물을 심어놓고 자라나는 모습을 보며 행복해할 진데

하물며 금쪽같은 내 자식을 기를 때의 그 행복은 말해 무엇하랴.

 

오늘도 어김없이 밥 한술 뜨고 창밖을 내다보고를 반복하면서 하루를 연다.

나는 고된 일을 마다하는 농부들을 볼 때마다 인생 참으로 고달프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텃밭에 채소를 기르며 어린싹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는 행복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면서 농부들은 고된 노동에 버금가는 행복이 따른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가을 수확을 꿈꾸면 힘들어도 힘든 줄 모르고 버텨내는 농부의 행복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본다.

 

말도 못 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식물이지만, 식물도 분별력이 있고 사리를 분간할 줄 안다.

한 연구에 의하면 화분에 같은 종류의 식물을 심어놓으면 식물은 자기 형제라는 걸 구별하고

뿌리가 사이좋게 지낸다.

하지만 다른 종류의 식물을 한 화분에 같이 심어놓으면 뿌리는 흙 속에서 격렬하게 싸운다는

것이다.

보이는 곳에서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나 삶의 경쟁은 늘 치열하다.

 

아침이면 뒷마당에 나가 밤새 안녕하신가?” 하며 채소들을 살펴본다.

채소들은 나를 보고 기쁜 얼굴로 방긋 웃는다.

주인님 안녕하세요?” 인사도 한다.

밭작물은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내가 얼마나 많은 정성을 들이느냐에 따라서 뒷마당 채소도 몸가짐을 달리한다.

 

올해도 호박을 12포기나 심었다.

엊그제부터 꽃이 피기 시작했는데 지난해처럼 호박꽃은 사람의 속을 무척이나 썩인다.

지난해보다 더하면 더 했지, 조금도 덜하지 않았다.

첫날 수꽃은 하나도 없이 암꽃만 7개나 피었다. 다음날은 암꽃만 8개가 더 피었다.

아이쿠. 큰일 났구나.’ 아무리 들춰봐도 수꽃은 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금년 농사 다 망치게 생겼다.

암꽃이 도와달라고 나만 쳐다보는 것 같아서 그냥 못 본 척하고 넘길 수가 없었다.

지난해처럼 중국 노인들이 사는 아파트에 연락해 보았다.

혹시 호박꽃이 피었느냐고 물어보았으나 금년에는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호박꽃이 피려면

아직 멀었단다.

궁리 끝에 숫 호박꽃을 얻으려고 멀리 후리몬트 이발소까지 달려갔다.

여기까지 다녀가는데 드는 휘발유 가격이면 호박 20개는 사고도 남겠다는 이발사의

농지거리를 마다하고 나는 숫 호박꽃이 절실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암꽃이 6개가 더 피었다. 에라 모르겠다.

암꽃만 피든지 말든지 내버려 두기로 했다.

애처로웠지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매일 아침 수꽃을 찾아 헤맨다.

아침에 수꽃이 피었나 훑어보고 들어오는 아내가 함박웃음을 띠며 말했다.

수꽃이 두 개나 피었단다.

나는 아침을 먹고 뒷마당에 나가서 커다란 호박잎 숲에 숨어서 피어있는 배리배리한 수꽃

두 개가 눈에 띈다. 호박꽃이라고 하기에는 초라하기 그지없다만 그래도 반가웠다.

 

인간은 더 많은 열매를 얻기 위해 연구하고 종자를 개량하지만, 개량종의 폐단을 예단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약은 고양이 밤눈 어두운 줄 모른다고 인간의 두뇌가 식량을 해결해 줄 것 같지만

인간이 모르는 영역이 도사리고 있어서 엉뚱한 결과를 초래한다.

마치 인간이 저지른 죗값을 기후변화라는 대가로 치르는 것처럼.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