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카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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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카카오톡 계정이 없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누구나 이용하는 카톡 시대다.

오죽하면 다음이메일 계정을 카톡 계정으로 바꾸겠다고 하겠는가?

아무튼 카톡이 대세인 것은 분명하다.

 

카톡도 한때이지 영원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8트랙을 시작으로 카셋 테이프가 나오더니 CD로 바뀌면서 USB로 변했다.

삐삐를 시작으로 통짜 핸드폰이 폴더불로 바뀌고 액정 화면으로 무장한 폰이 세상을

평정하면서 사진과 글자를 보내더니 e-mail도 잡아먹는 세상이 되었다.

아마 모르기는 해도 새로운 무엇인가가 나타나 또 한 번 세상을 뒤집어놓는 혁명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나.

디지털 문명이라는 게 파도 같아서 밀려왔다가 밀려갈 것으로 여겨진다.

10년 전 만 해도 카톡이 우리 삶 속에 이토록 깊숙이 파고들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지금은 카톡 기능이 더욱 발달해서 전화기만 있으면 언제든지 누구에게나,

지구상 어디에 있던지 공짜로 영상통화가 가능해졌다.

 

그런가 하면 카톡으로 떠다니는 동영상이 하도 많아서 내가 죽을 때까지 보아도

다 보지 못하고 죽어야 할 것 같다. 그중에는 볼만한 것이 있는가 하면 쓰레기 수준도 많다.

원래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이 선택의 구렁텅이를 의미한다.

선택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아서 골치 아픈 게 자본주의이다.

1970년 내가 처음 미국에 갔을 때 TV 채널을 돌려보면 채널 30군데서 영상이 나왔다.

한국에서 KBS 하나만 보다가 간 나는 깜짝 놀랐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한국이야말로 TV 채널이 수도 없이 많다.

하다못해 일인 방송 유튜브가 기성을 부리지 않는가.

북한처럼 단순한 사회에서 살던 사람은 남한에 와서 다양한 선택에 혼선을 빚기 마련이다.

내가 살아봐서 아는 건데 다양한 선택의 사회가 단순 사회보다 더 좋은 사회라는 건 맞다.

예를 들어서 글을 쓴다는 것은 단어의 연결인데 많고 다양한 단어를 알고 있어야

단어의 선택폭이 넓어서 좋은 글이 태어나는 것과 같다.

 

카톡에서 떠다니는 수많은 영상들을 수시로 보내고 받고 한다.

이게 공짜이니 이렇게 쉽게 주고받지 만일 한번 보내는데 얼마라도 돈을 내야 한다면

아무도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공짜라고 해서 마냥 동영상을 주고받아도 되는 건가?

 

한마디 인사도 곁들이지 않은 퍼온 영상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음악까지 곁들인 길고 긴 퍼온 글속의 대리 인사가 절절하긴 하다.

그런데 이런 똑같은 퍼온 글이 때로는 두 개, 세 개, 여기저기서 동시에 날아오기도 한다.

날아온 글을 그냥 퍼서돌리기도 하고.

감동적인 글 혹은 세상 어디선가 일어나고 있는 기이한 상황이나 풍경을 보는 수도 있지만,

출처를 알 수 없는 이상한 글을 다른 사람에게 전송하라는 황당한 요구까지 달아서

날아들기도 한다.

이렇게 날아드는 글이며 동영상을 어떻게 보아주어야 하나.

 

아름다운 친구야

 

시작도 끝도 없이 언제나 변함없는

모습이고 싶습니다

 

슬픈 날에는 손잡아 위로하고

기쁜 날에는 함께 춤추고 노래하며

서로의 행복을 위하여 기도하겠습니다

 

아름다운 꿈을 엮어 등불처럼 밝혀주며

~길 함께 웃으며 갈 수 있는

넉넉한 햇살이고 싶습니다

 

날마다 서로의 가슴에 그리움을 꽃피우고

잊혀지지 않도록 이름을 불러주고 싶습니다

 

지치고 힘든 날엔 가슴을 열어

행복한 여행을 함께 떠나고 싶습니다

 

뒤돌아보아도

가장 아름다운 추억이고 싶고

사랑보다 큰 것이 어디 있겠나마는

 

~ 주고도 더 주고 싶은

아름다운 사람이고 싶고……

 

우정은 산길과 같아서

매일 오가지 않으면 잡초가 우거지고

그 길이 없어지고 맙니다

 

옮긴 글

 

누구의 글이면 어떻고 누가 옮겼으면 어떠냐 아침에 잠깐 읽고 아름다웠으면 그만이지

마치 꽃집 앞을 지나다가 진열장 안에 피어있는 장미꽃을 보고 행복한 미소를 지었던 것처럼.

 

수년 전이지만 카톡에 동영상 떠도는 게 싫어서 전화기를 꺼놓고 잠자리에 들던 때도 있었다.

이건 내 경험인데 어떤 친구는 내게 부탁하기를 자기에게 소식만 카톡으로 보내달란다.

떠다니는 글이나 영상은 제발 보내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그까짓 거야 간단하다고 생각했다.

그 친구에게 보내던 카톡은 중단했다. 그런지 5년도 넘었을 것이다.

보낼 소식이 없으니 소식이 끊긴 거나 마찬가지다.

다시 60년대로 돌아간 것 같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그냥 잘 지내고 있겠지 정도다.

하긴 옛날에는 그렇게 살았다. 어떤 때는 10, 20년 소식 없이 살았다.

 

오늘 생각해 보는 건데 카톡에서 떠도는 영상이나마 보내는 것이 곧 무언의 교신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냥 연락 없이 일 년이고 이년 아니면 10년 지내다가 어느 날 누구누구 죽었대 하는

소리 듣는 것보다 빈 연락이라도 오고 가면 죽었는지 살았는지 정도는 알 것 아닌가.

아닌 게 아니라 LA에서 사는 친구가 심장 수술받고 예후가 좋지 않다는 소식을 카톡으로

보내왔다. 보내오면서 이런 글도 적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이 없어서 이 글이 마지막이 될 것 같단다.

소식을 받은 지 벌써 7개월이 넘었다.

나는 예전처럼 줄기차게 영상을 보내는데 회신은 한차례도 받지 못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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