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소설 ‘코로나 바이러스 2019’

IMG_1-1-4-1

멀리 샌프란시스코 공항 활주로를 내려다본다.

이륙 활주로 세 곳과 착륙 활주로 두 선이 쉴 틈 없이 바쁘다.

2~3분에 한 대씩 차고 오른다. 아니, 두 대가 동시에 날아오른다.

각도를 달리한 착륙 활주로에 줄줄이 내려앉는 거대한 동체가 깃털처럼 가벼워 보인다.

차가운 아침 공기를 가르며 서울발 대한항공 비행기가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이국에서 대한항공을 보면 내 가족을 만난 듯 반갑다.

하늘색 기체가 착륙하는 내내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대한항공이 곧 고국이고, 고국은 언제나 그리운 노스탤지어다.

가고 또 가도 그립기만 한 곳….

 

비행장이 한눈에 보이는 언덕진 공원 주차장에서 대한항공을 기다렸다.

차에 앉아 앞 유리를 통해 착륙 활주로에 다가서는 비행기를 하나하나 주시했다.

그토록 그리던 남편은 KE 023편으로 돌아온다고 했다.

스마트폰이 작동하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고 고이 접어 옆자리에 놓아둔다.

남편은 입국 수속을 마치고 수화물 담은 카트를 밀면서 픽업 존으로 나올 것이다.

그리고 내게 “It’s ready.”라고 문자 메시지를 날리겠지.

문자를 받는 순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부지런히 그이를 픽업하러 달려가야지.

언제부터였던가. 우리의 만남은 공항 로비에서 기다리는 대신 비행장 근처 공원에서

대기하다가 문자를 받으면 곧바로 달려가 픽업하는 방식으로 바뀌어 있었다.

남편은 한국 국적 회복 신청을 하기 위해 한국에 나가 여섯 달도 넘게 홀로 지내다가

돌아오는 길이다.

 

오랜만에 만나는 남편은 어딘가 수척해 보였다.

혼자서 해 먹는 게 부실해서였을 거라고 짐작했다.

여행 가방을 차에 싣고 렉서스 SUV를 몰아 280고속도로에 올라섰다.

일요일 아침이어서 그런지 차량이 별로 없다.

텅 빈 고속도로에서 속력을 높여도 달린다는 느낌이 오지 않았다.

무료함을 깨려고 어젯밤 제임스가 집에 들렀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2층 서재에서 글을 쓰다가 목이 말라 주스라도 한 잔 마실까 해서 내려갔다.

한참 늦은 저녁이라 밖이 어두웠다. 불을 켜고 부엌으로 들어서려는데 돌 벨이 울린다.

‘누굴까?’ 하는 의문이 들면서 고개가 절로 갸웃거렸다.

현관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뜻밖에도 큰 조카 제임스다.

언니의 아들인데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는 제임스의 소식은 언니를 통해서만 들었지,

직접 만나 보기는 오늘이 처음이다. 너무 오래돼서 조카의 모습은 잊고 살았다.

어울리지 않는 콧수염을 기른 게 생뚱맞아 보였다. 반갑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웃으면서 들어오라고 했다.

제임스를 애로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오늘 내 앞에 나타난 제임스는 의젓한 중년의 모습이다.

 

제임스는 혼자가 아니다. 젊은 여자와 같이 왔다.

지나가는 길에 들렸다고 하면서 성큼 발을 들여놓았다.

제임스는 수잔을 소개해 주면서 와이프라고 했다.

결혼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데 와이프라니? 황당하게 들렸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난 것도 그렇고, 갑자기 와이프라고 소개

해 주는 바람에 조금은 어색하고 얼떨떨했다.

얼떨떨한 건 처음 만나서가 아니라 우리와는 종족이 다른 새까만 피부의 여자였기 때문이다.

머릿결이 곱슬머리가 아닌 것으로 보아 아프리카 출신은 아닌 것 같고,

어쩌면 인도나 스리랑카 출신일지도 모른다고 짐작했다.

나는 미국에서 오래 산 여자다.

인종 차별처럼 들리는 대화는 금물이라는 걸 알기에 대놓고 묻지는 않았다.

제임스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서더니 불이 환하게 밝혀진 부엌 싱크대 앞에 섰다.

수잔도 따라 들어왔다.

마침 싱크대에는 엊그제 LA에서 있었던 문학 공모전 시상식에서 받아온 상패가 투명한 비닐

봉지에 싸인 상태 그대로 놓여있었다. 남편이 오면 보여주기 위해 끄르지도 않은 것이다.

 

― 이게 뭐예요?

 

제임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상패를 집어 들었다.

 

― 『미주한국일보』 문예 공모전? 이걸 누가 받은 거예요?

 

제임스가 상패에 쓰인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 이모가 받은 거라고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뜨악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쳐다본다.

 

― 이모가 소설을 쓴다고요? 소설은 어려운 건데……

 

제임스는 중학교 때 부모를 따라서 미국에 이민 왔으니 한국말도 잘하고 한글도 읽을 줄

안다. 입가에 미소를 띠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제임스가 급하다면서 화장실로 달려갔다.

나는 웃으면서 수잔을 바라보았다. 제임스보다 열댓 살은 어려 보였다.

 

― 이리로 들어와 앉아요.

 

패밀리룸으로 들어서면서 가죽 소파를 가리켰다.

나는 소파와 기역 자로 놓인 러브 시트에 앉으며 수잔과 얼굴을 마주했다.

‘무언가 말을 해야 서먹서먹한 분위기에서 벗어날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생각 없이 떠오르는 대로 말했다.

 

― 그래, 아이는 언제 낳을 생각이에요?

 

안 했으면 좋았을 말이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왔다.

말을 해 놓고도 곧 후회했다. 젊은 애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 “결혼 언제 할 거냐?”,

“애는 언제 낳을 거냐?”라는 말이라는 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수잔은 잠시 입가에 미소를 짓더니 머뭇거렸다.

 

― 안 낳을 거예요.

 

또렷하게 딱 잘라 말한다. 당혹스럽게도 들렸지만, 너무 당당한 표정이어서 더는 묻지 않았다.

하지만 ‘조카는 사십 중반인데……’ 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맴돌았다.

제임스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자리는 매우 불편했을 것이다.

 

― 세인트 프랜시스 병원 응급실에서 근무하기로 했어요.

 

이미 언니한테 들어서 알고 있는 사실을 제임스가 되뇐다.

세인트 프랜시스 병원은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에 있는 유서 깊은 병원이다.

 

― ‌퍼시픽 하이츠에 새로 집을 사서 이사 왔어요. 한번 놀러 오세요.

 

이 말도 언니에게 들어서 이미 알고 있었다.

 

― 그래, 알았다. 시간 나는 대로 가 보마.

 

― 이모부는 어디 갔어요?

 

― 어~ 한국에 나갔어. 내일 돌아올 거야.

 

제임스는 어두운 뒷마당으로 나가 둘러보는 꼴이, 지가 어렸을 때 즐겨 놀던 농구대를

찾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문을 열고 들어서던 제임스가 말했다.

 

― 농구대가 없네요.

 

― 그거 치워 버린 지가 언젠데……

 

제임스는 수잔더러 이제 돌아가자면서 손을 잡아 일으켰다.

 

― 우리 집에서 멀지 않으니까 자주 들를게요.

 

둘이서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 남기고 가버렸다.

갑자기 찾아온 이유가 새로 집을 사서 이사 온 걸 자랑하고 싶어서 들른 것 같았다.

 

장시간 여행에 지쳐 피곤해 보이는 남편은 오래간만에 듣는 제임스의 소식을 반가워했다.

 

― 잘됐네. 좋은 병원에서 근무하게 됐고, 좋은 동네에 큰 집도 사고.

가까운 곳에 살게 되었으니 참 잘된 거야.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