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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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변호사의 아들 학폭 사건이 세간의 화제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만큼 학폭은 국민의 관심사이기도 하고 한번 학폭은 영원히 회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퇴근길 수인분당선 열차 내에서 흉기 난동을 벌인 37살 여성의 괴이한

사건이 세간의 이목을 끈다.

난동을 부린 여성은 경기 용인시 수지구 수인분당선 죽전역 인근을 달리던 열차 안에서

60대 여성 승객과 말다툼하던 중 칼을 휘둘렀다.

이로 인해 60대 여인은 허벅지에 자상을 입었으며, 주변에 있던 다른 남자와 여자 승객도

얼굴에 자상을 입는 등 모두 3명이 다쳤다. 이들은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범행 직후 여인은 다른 승객들에게 제지당했으며, 곧바로 현장에 온 죽전역 역무원들에 의해

검거됐다.

범행을 저지른 여자는 이날 조사에서 한 승객이 나한테 아줌마, 휴대전화 소리 좀

줄여주세요라고 했는데 아줌마라는 말에 기분이 나빠서 그랬다라고 말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이해도 된다.

 

내가 갓 스물 때다. 이모네 집에서 자고 아침에 일어나 마당으로 나갔다.

그때가 겨울이어서 마당 수돗가엔 얼음이 얼어있었다.

어떤 네다섯 살 먹은 사내아이가 썰매에 앉아서 낑낑거리고 있었다.

아이는 나를 보자마자 아저씨 나 좀 밀어줘요하는 게 아닌가.

나는 깜짝 놀랐다. 생판 못 보던 아이가 제집인 양 큰 소리로 나를 부려 먹으려는데

놀랐고, 나를 아저씨라고 부르는 소리에 놀랐다.

내가 아저씨인가? 처음 아저씨라고 불린 기분이 묘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이종사촌 누님의 4살 먹은 아들인데 밤늦게 와서 잤단다.

아이가 습기가 좋아서 아무나 보고 아저씨하고 부른단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도 학폭이 있었다.

주먹깨나 쓰는 친구들이 몰려다니면서 눈에 거슬리는 동창들을 괴롭혔다.

그중에 한 명 덩치는 조그마해도 운동을 해서 어깨가 딱 벌어진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툭하면 시간을 빼먹었다.

우리 친한 친구들끼리는 그 친구를 땡땡이라고 불렀다.

땡땡이친구는 아버지가 버스 회사를 운영하는 부잣집 아들이었다.

내가 인생 다 살고 난 지금 생각하면 땡땡이의 아버지는 돈 버는 재미에 빠져서

아들의 인간성 교육에 실패한 사람이다.

땡땡이친구야말로 이 반 저 반 돌아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아이들을 괴롭혔다.

나도 댕댕이친구에게 붙들려 반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망신당하고 난 후로는

그를 보면 피해 다녔다.

그것도 그때뿐, 졸업 후에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아이 낳고 한창 바쁘게 살 때다. 캐나다에서 사는 친한 친구의 어머니가 위독하셔서

병문안 차 친구네 집엘 갔다. ‘땡땡이친구도 캐나다 같은 도시에서 살았다.

친한 친구가 내 눈치를 살피면서 우리 동창 땡땡이가 너 오면 자기네 집에

꼭 들러 달라고 당부하더란다.

친구네 집에서 이틀 밤을 잤지만 땡땡이는 만나지 않았다.

그때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으나 땡댕이친구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

학폭 후유증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1년인가 지난 어느 날 캐나다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땡땡이가 너한테 가겠다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니? 지난번에 네가 우리 집에 왔을 때

땡땡이가 음식을 차려놓고 너를 기다렸는데 들리지 않았다고 섭섭해하더라.”

음식까지 차려놓고 기다렸다는데 나도 참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수 없이 그러면 오라고 했다.

땡땡이친구가 우리 집에 온 다음 날 아침 아내는 부엌에서 아침 준비를 하고 있었다.

땡땡이친구가 부엌에 가서 내 아내를 보고 느닷없이 아줌마!“하고 불렀다.

그때 아내는 30살 젊은 나이였다.

아내도 당황했겠지만, 그냥 가만히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나를 쳐다보면서

이 사람이 나더러 아줌마래?“

이번엔 내가 당황했다. 아내에게 땡땡이는 어깨라고 말해 준 게 원인이었나?

분위기는 이상야릇하게 돌아갔다.

땡땡이친구도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내게 대고 말했다.

아줌마가 나쁜 말이냐?“

내가 대답해야 할 차례인데 갑자기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 나쁜 말은 아니지. . 자 이쪽 테이블에 앉자.“

그러면서 얼버무렸던 생각이 난다.

 

젊은 여자에게 아줌마하고 부르면 놀라면서 듣기 싫어한다.

하지만 할머니에게 아줌마하고 부르면 웃으면서 좋아한다.

아줌마나 아저씨라는 말은 매우 훌륭한 호칭이기는 하지만 때와 장소에 따라서

의미를 달리한다.

어울릴 만하게 부르면 빛을 발하지만 잘못하다가는 오해를 살 수도 있다.

술집 여자들이 왜 할아버지를 오빠라고 부르겠는가?

 

학폭을 저지르는 학생들은 자기가 하는 언사며 행동이 폭력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냥 쓰는 거다. 그게 근성이라는 거다.

아들은 아버지를 보고 배우고 딸은 어머니를 보고 배운다. 근성도 따라 익힌다.

아무나 보고 아줌마라고 부르는 게 땡땡이친구의 잘못이기보다는 그의 돈 잘 버는

사장 아버지의 책임이 크다.

미성년자의 옳고 그름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아버지의 책무가 무겁기 때문이다.

땡땡이친구는 무엇이 맞고 틀린지 배울 기회도, 뉘우칠 시간도 없이 성년이 되어버렸다.

안타깝지만 이런 일은 지금도 도처에서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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