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최고의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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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행복한 노인인 줄 몰랐다.

엊그제 두툼한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디지털 시대에 손편지는 귀해서 받아 들고도 얼떨떨했다.

92세 어르신이 나와 고등학교 동문이라면서 장문의 글을 보내왔다.

나는 동문회에 나가지도 않았는데 동문회에서 내 주소를 알았단다.

내용은 별것 없고 노인이 외로우니까 자주 만나자, 이야기나 나누자는 거다.

부인과 같이 산다면서 외롭다니?

나는 살면서 외로워하는 노인을 많이 보았다.

외로워서 무섭다느니, 우울증에 걸릴 것 같다느니, 죽고 싶다느니 하는 말도 들었다.

 

사람들과 만나고 할 때는 느끼지 못하지만, 집에 덩그러니 혼자 있을 때 홀로라는

생각이 두려움으로 바뀐단다.

젊어서는 혼자 사는 게 두렵지 않았던 것은 젊음이라는 에너지 때문이었다.

다음날 해야 할 일이 밀려 있는데 사치스럽게 외로울 시간이 어디 있나?

하지만 은퇴 이후의 삶은 다르다.

다음날도 일없이 하루를 보내야 하는 경우가 많고 80세 이후는 더욱 할 일이 없다.

지루하고 평안한 그리고 따분한 일상이 지속되는 것이 일반적인 노인의 하루다.

 

가끔 일찍이 와이프 잃은 친구한테서 전화라도 받으면 이 친구야말로 외로울 텐데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물어보면 아니란다.

아닐 리가 있나. 집안에 여자가 없으면 보나 마나 엉망일 것이다. 먼지가 쌓여 있을 것이다.

오죽하면 홀아비는 이가 서말, 과부는 은이 서말이란 속담이 있겠는가?

홀아비야 그렇다 치더라도 과부는 어떻게 해서 은이 서말이나 되나?

이가 서말이란 말은 고리타분하다는 말이고, 은이 서말이란 말은 마음이 부자, 풍요롭다는

말이다. 과부는 왜 마음이 풍요로운가?

남편 시중을 들지 않아도 되니까 과부의 마음이 편하다는 뜻이다.

 

홀아비는 먹는 것도 잘 챙겨 먹지 못해서 건강 상태도 부실하기 마련이다.

내가 한국에 들어가면 일산 오피스텔에서 혼자 살아봐서 아는 건데 끼니마다 해 먹는 게

귀찮고 더군다나 설거지하기 싫어서 가능하면 설거지 간편하게 기름기 없는 음식에

찌꺼기 남기지 않으려고 머리를 쓰다 보면 음식이 모자라는 때가 많다.

그렇다고 다시 해 먹기도 귀찮아서 군것질로 배를 채운다.

혼자 사는 친구라고 다르겠는가? 부실한 식생활과 외로움으로 고생스러울 게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은퇴 생활 중 가장 견디기 힘든 것 세 가지.

첫째. 일이 사라진 것. 직업을 천직으로 여기며 좋아하던 사람들은 특히 상실감이 크다.

둘째. 정체성 상실. 수십 년 직장을 축으로 형성된 정체성이 은퇴와 함께 사라지면서

존재감이 무너진 느낌이다.

셋째. 건강 문제. 지병이 악화해 고통과 외로움 속에 죽음을 맞게 될 두려움이다.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일뿐이다.

 

은퇴와 동시에 닥쳐오는 이런 문제들을 나는 한 번도 당해 보지 못했다.

젊어서부터 남보다 더 바쁘게 살았다. 남보다 더 일에 몰두했다.

남보다 많은 아이 셋을 길렀다.

우리 부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았다.

은퇴를 십 년쯤 앞두고 조선일보에 블로그 쓰느라고 바빴다.

일주일에 글 세 편씩 올리려면 바삐 움직이고 써야 한다.

더군다나 일과 병행하려면 밤잠을 설칠 정도로 바빠야 한다.

그러다가 은퇴했더니 이번에는 더 바빠졌다.

글쓰기가 발전해서 본격적으로 작품을 써야 하니 이거야말로 피를 말리는 작업이다.

늘 시간이 부족해서 쫓기다 보면 만나야 할 사람도 다 거절하게 된다.

은희경 소설가 말마따나 소설을 쓰다 보면 친구고 친척이고 다 떨어져 나간다는 말이 맞다.

시간에 쪼들리는 사람에게 외롭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노년이 몰고 오는 거대한 시간의 백지에 무엇을 그릴 것인가.

무엇을 하면 생의 의미가 생기고 노년이 행복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오로지 자신만이

풀어야 할 과제다. 아무도 도와줄 수 없다.

이것은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을 하면 된다.

나는 내가 알아서 은퇴 후에 노년 생활을 준비한 게 아니라 내가 좋아서 하다 보니까

은퇴를 맞이한 것이다.

내가 잘하고, 좋아하며, 가치와 보람을 느끼는 일거리에 빠져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살다 보면 노년이 짧다. 외로워할 짬이 없다.

해야 할 일은 많은데 남은 시간은 별로 없고, 마음만 급하다.

그렇게 바쁘게 살았더니 나더러 행복한 노년이란다.

내가 행복한 노인인지 모르겠으나 나는 오늘도 바쁘다. TV 볼 시간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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