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의 파리, 모더니즘과의 대화

반고흐의파리,모더니즘과의대화

불멸의화가,반고흐

1853년네덜란드준데르트에서태어나1890년37세의일기로파리북쭉

오베르쉬르우아즈에서스스로생을마감한반고흐는예술의모든것

을바친불운한천재의원형이다.

10년이라는짧은예술가로서삶을살면서인생의모든것을예술에걸었고

삶의모든것을예술에담아내기위해그누구보다처절한삶을살았던그는

19세기미술의신화이다.

예술의전당’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기획된<반고흐in파리>는
파리시기(1986.3~1988.2)를주제로꾸며진테마전이다.
빈센트반고흐의10년이라는짧은화가로서의생애중,예술적토대를이룬 가장중요한파리체류2년간은반고흐의양식적변화를이룬가장중요한 시기로인상주의라는새로운사조의발견을통한새로운화가로탄생하는 시기이다. 전시사상최다반고흐자화상작품전시 본전시에는전세계에서개최된반고흐개인전가운데서가장많은수의 자화상작품들이한자리에선보인다. 반고흐가그린자화상은모두36점으로이중파리체류시기에그린자화상 27점가운데9점의전시를통해비운의화가의얼굴을다각도로조명하였다. 모델을쓸수없었던가난한화가반고흐의양식적변화와발전은자신을 모델로한반복적작업을통해이루어졌다. 사실주의화가에서모더니스트로 반고흐의파리시기는도시노동자와농민의삶을주제로지극이어두운색조로 그림을그리던사실주의화가에서빛을머금은화사한색으로현대성을표현한 모더니스트로변모해가는과정이다. 회화기법과양식의급격하고획기적인변화는파리에서이루어지게되는데 어두운그림에서밝은그림으로,두꺼운터치에서얇은터치로,옛것에서새로운 것으로,한정된주제에서다양한주제로,닫힌세계에서열린세상으로변한다.

즉,반고흐의파리시기는화가반고흐의재탄생의길을열어준시기이도하다.

반고흐,불꽃같은예술혼을만나다!

기간-2012.11.8-2013.3.24

장소-예술의전당디자인미술관
문의-588-2618
관람가격-성인15,000원어린이8,000원

회색펠트모자를쓴자화상 유화-44.5×37.2cm 반고흐미술관(빈센트반고흐재단).암스테르담. 그는이작품을붉은색물감을사용하여스케치했다. 그후물감을두껍게발라크고작은붓터치로채색 해가며율동감있는질감을연출했다.그는배경보다 자신의얼굴에집중하여세밀한붓으로채색했으며 이작품을통해강렬한색조를탐구했다. 과장된장된후광의색채와붓터치는마치반고흐를 미국전쟁화의인디언처럼보이게하지만,이러한 과장된양식은색채를어디까지사용할수있는지 알기위함이었다.

12

1.자화상slfe-portrait.1887.3.6

마분지에유화.41.0×33.0cm

반고흐미술관.암스테르담

반고흐는파리시기에자화상을27번을그렸다.

이자화상에서그의얼굴은섬세한붓으로채색했는데,동일한붓을이용하여

턱수염과머리를그렸다.

1887년봄부터이러한섬세한붓터치는반고흐작품의전형이되었다.

이작품은마분지위에그려졌으며여러준비단계를거쳤다.

2.테오반고흐의초상PortraitofTheoQanGogh1887여름(Summer)

마분지에유화.19.0×14.0cm

반고흐미술관.암스테르담

34

3.자화상slfe-portrait.1887.7.8

캐버스에유화.42.2×34.4cm

반고흐미술관.암스테르담

4.자화상.1887.여름.

마분지에유화19.0×14.0cm

반고흐미술관.암스테르담

56

5.카페에서,르탕부랭의아고스티나세가토리1887.1.3

캔버스에유화55.5×47.0cm

반고흐미술관.암스테르담

6.카페에서,르탕부랭의아고스티나세가토리

엑스선촬영X-Radiograph.여인의흉상

반고흐가프랑스사실주의와인상주의의화두였던’혼자술을마시는여인’을

처음작품으로구현한것이다.이작품주인공인이테리출신아고스티나세가토리는

당시반고흐의연인이었다.그는섬세한붓칠로얼굴의곡선을이어갔으며이로인해

얼굴부분은다소부조처럼보이기도한다.이러한기법은다른작품에서는보이지않

고오로지세가토리의초상에서만보인다.

탕귀영감PortraitofPereTanguy1887.

캔버스에유화92.075.0cm

로댕미술관,파리

이작품의주인공은클로젤가에서작은화구상을운영하던’탕귀영감’이라고

불렀던줄리앙프랑수아탕귀이다.

반고흐는소중항친구탕귀의초상화를세점남겼다.

그는인물과그주변을색채만을활용하여색상의상호보완과대조를이끌어냈다.

자신이소장하고있던화사한일본판화를배경으로사용해마치탕귀영감을일본인

현자인것처럼표현함으로써그에대한존경심을나타냈다.

.

식당내부풍경InteriorofaRestaurant1887여름

캔버스에유화45.5×56.0cm

크뢸러뮐러미술관.오텔로

이작품은전반적으로점묘화풍이고미세한점과색채간의대비와상호조화가잘

이루어졌다.이작품속의식당은축제분위기로내부를그렸으나손님은아무도없다.

작품중앙에벽걸이처럼보이는포스터는당시반고흐가일본판화에대해가졌던관심이

투영된것이다.이작품은반고흐의신인상주의회화의정점을보여준다.

쟁기로간들판PloughedField1888.9아를르Arles

캔버스에유화72.5×92.5cm

반고흐미술관.암스테르담

연인이있는정원.셍피에르광장GardenwithCourtingCouples:SquareSaint-Pierre1887.5

캔버스에유화75.0×112.7cm

반고흐미술관.암스테르담

센느강둑19875월중순-7월말,파리

캔버스에유화32.0×46.0cm

반고흐미술관.암스테르담

반고흐는이작품에서이시기의다른작품들처럼물감을아끼지않고두껍게

발랐다.붓터치가건조해보이며사용한물감색에따라붓터치의형태가비슷한

것은물감을튜브에서바로짜서사용했기때문에생긴현상이다.

화가는화폭에서공간감을표현하기위해화면오른편의나무와강둑은두껍게

칠하고왼편으로갈수록엷게채색했다.그는붓을율동감있게움직여채색함으로써

이작품을절정으로끌어올렸다.

빈센트반고흐의생애 반고흐의일생은짧고험난했다. 인생의후반과달리반고흐의유년시절은비교적평탄했다. 네덜란드신교도목사의가정에장남으로태어난그에게는남동생두명과여동생 세명이있었다. 열한살때그는근처마을의기숙학교로보내졌다가가난으로15세때학교를그만 두었다. 1866년에는틸버그에있는고등학교로옮겼다. 1868년초,그는준데르트로돌아왔고일년후그의부모는그를세상으로내보냈다. 열여섯살때,그는화상으로성공한숙부가운영하는구필화랑의헤이그지점에서 동생테오와함께브뤼셀지점에서일하게되었다. 구필화랑에서일을시작하였다. 1873년빈센트는헤이그를떠나구필화랑런던지점으로발령받아영국에서머물렀으며 1875년부터는파리지점에서일했다. 그는런던에서부터신비주의에빠져화랑일을소홀히하다해고를당하였다. 성직자의길을열망하였던빈센트는파리를떠나영국램스케이트로갔다. 그는매일성경을탐독하고설교활동을하였으며복음전도사가되기위해노력하였다. 네덜란드암스테르담으로돌아온빈센트는할아버지와아버지를따라목사가되기로 결심하고신학대학에들어가기위해공부에전념하였으나암스테르담신학대학에 낙방하였고전도사양성학교에서도그의자질이부족하다고여겨6개월간평신도로서 전도활동만을허가하였다. 빈센트는가난한사람들에게복음을전파하기위해보리나주로떠났다. 이곳에서그는최하층민의생활을직접체험하기위해오두막에서지내며전도활동에 전념하였다.그러나그의광신도적인기질과격정적인성격때문에결국교회로부터 전도사로받아들여지지않았다.

1880년실의에빠진빈센트는그동안계속해온습작을바탕으로그림을그리는일이

자신을구원하는길이라고믿고화가가되기로결심하였다. 빈센트는미술공부를위해다시파리로갔다. 드로잉에관한기초지식이부족했던빈센트는라파르트라는5살아래의미술학도에게서 드로잉을배웠다. 이후빈센트의외사촌이자헤이그화파의유명한화가였던안톤모베의화실에서유화를 그리게되면서본격적인미술수업을받았다. 이시기에빈센트는그동안열광했던종교에반감을가지고있었으며목사인아버지와 갈등을일으키기도하였다. 그는과격한성격으로자신에게어떠한비판도받아들이지않았고작은충고에도심각한 상처를입곤했다. 그런그의성격때문에그에게그림을지도하던안톤모베와도절교하게되었다. 빈센트는크리스틴이라는매춘부출신의여자와동거를하며지냈는데그녀는알콜중독에 매독환자였다. 빈센트의가족은그가크리스틴과지내는것을우려하였고동생테오는그녀와헤어지기를 강요하였다. 빈센트는그녀와헤어지는것을괴로워하였지만생활비를줄이고그림에전념하기위해 그녀와어린아이를저버리게되었다. 빈센트는이때문에양심의가책으로오랫동안고통을받았다. 마침내빈센트는브뤼셀·헤이그·앙베르등지에서본격적으로그림을그리는데, 언제나노동자·농민등하층민의생활과풍경을그렸다. 초기걸작《감자먹는사람들》(1885)은이무렵의작품이다. 1886년화상점원으로일하고있는동생테오를찾아서파리에나온빈센트는코르몽의 화숙(畵塾)에서베르나르와툴루즈로트레크를알게되었다.

인상파의밝은그림과일본의우키요에[浮世繪]판화에접함으로써그때까지의

렘브란트와밀레풍(風)의어두운화풍에서밝은화풍으로바뀌었으며,정열적인 작품활동을하였다. 자화상이급격히많아진것도이무렵부터였다. 그러나곧파리라는대도시의생활에싫증을느껴1888년2월보다밝은태양을찾아서 프랑스아를로이주하였다. 아를로이주한뒤부터죽을때까지의약2년반이야말로빈센트반고흐예술의참다운 개화기였다. 그는그곳의밝은태양에감격하였으며《아를의도개교(跳開橋)》《해바라기》와같은 걸작을제작했다.

한편새로운예술촌건설을꿈꾸고고갱과베르나르에게그곳으로올것을끈질기게

권유하였다. 그리하여장폴고갱과의공동생활이시작되었으나성격차이가심하여순조롭지못하였다. 1888년말, 간질증상이나타나밝은미래에대한꿈은묵살되었다. 헛것이보이기도하였다. 정신병으로고생하였다고하였으나환시는간질의한증상일뿐, 지금으로부터120여년전의의학으로는부위별간질증상의정확한진단은 어려웠을것이다. 간질증상은뇌의부위에따라다섯가지증상이나타나는데이증상은 개인에따라각기달리나타난다고한다. 환청이나환시혹은그이상의다른증상이부위별로다른데 한가지혹은여러증상이겹치기도한다.(과학저널) 뇌의부위별증상이각기다르다는것이밝혀진것은그리오랜전의 일이아니다. 그의격정적인성격과광신도적인기질로목사나전도사가될소양은 부족하다는소식에기인한우울증,그의증상환시등으로시달린데다 그와유대가깊었던폴고갱과도다툰후,면도칼로자신의귀를자른것은 자학의표현은아니었을까? 동생테오에게쓴편지나그가정신병원에감금되어한이야기조차 전부가그의진의(眞意)가담겨있기때문이다. 여기서발작이라고한것은간질발작인지,정신질환발작인지알수가없다. 그후빈센트의생활은발작과입원의연속이었으며,발작이없을때에는그동안의공백을 메우기라도하려는듯마구그려댔다. 발작과그림제작에지쳐파리근교오베르에있는의사가셰를(1890년5월)찾아갔다. 한때건강회복으로발작의불안에서벗어나는듯하였으나다시쇠약해져끝내권총자살을 하였다.

지금은온세계가그의작품을높이평가하지만그의정열적인작품이생전에는끝내인정

받지못하였다. 그가위대한화가라는인상을처음으로세상사람들에게준것은1903년의유작전이후였다. 따라서그는20세기초의야수파화가들의최초의큰지표가되었다. 그의작품은네덜란드에가장많이있는데,40점가까운자화상이외에도 《빈센트의방》《별이빛나는밤》《밤의카페》《삼(杉)나무와별이있는길》 등이유명하다.-지식백과- 참고-지식백과,도록,전시회참고물

*전시회장은촬영금지로그림은반고흐전시회홈페이지에서옮김.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