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금대의 신립과 청와대의 윤광웅.

임진왜란당시탄금대에서죽은신립을알면윤광웅이보인다.

신립(申砬),본관평산(平山).자입지(立之).1567년(선조즉위년)무과에급제,선전관을거쳐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경력(經歷)을지내고진주판관(晉州判官)이되었다.1583년온성부사(穩城府使)가되어북변에침입해온이탕개(尼湯介)를격퇴하고두만강을건너가야인(野人)의소굴을소탕하고개선,함경북도병마절도사에올랐다.1587년흥양(興陽)에왜구가침입하자우방어사(右防禦使)가되어군사를인솔,토벌에나섰다가이미왜구가철수했으므로돌아오던중양가의처녀를첩으로삼았다는삼사(三司)의탄핵으로파직되었다.곧함경남도병마절도사에다시등용되었으나,졸병을참살한죄로한직으로밀려남.1590년평안도병마절도사에보직되고이듬해한성부판윤을거쳐,1592년임진왜란이일어나자삼도도순변사(三道都巡邊使)로임명되어충주탄금대에배수진을치고북상해오는적군과대결했으나힘이미치지못하여패배,부하장수인김여물과함께강물에투신자결하였다.


그이전에신립은유성룡이모집한군관80여명과함께훈련한번받아보지못한농민들중에서군대를모집하여4월26일충주단월역에주둔하고진을쳤지만그가끌어모은군사는겨우8000명으로그것도화살한번제대로쏴본적이없는오합지졸이었다.그런오합지졸을데리고과거북방의야인몇차례진압한공을앞세워적을가벼이보고조총을들고날뛰는왜구무리앞에나섰으니지까이께안죽고배기겠는가이거다.저만죽으면좋을것을훈련한번제대로받지못한아까운8천여의생령마저탄금대의무주고혼을만든것이다.


더구나종사관김여물장군은“적의세력이우리의몇배나되니정면으로싸우면전세상불리할것이니,왜적의예봉을꺾으려면천험의요새인새재(조령)에복병을배치하였다가적이협곡안으로들어오면좌우에서일제히공격하여격멸하고만일적의공격을달항수가없으면차라리물러가한양으로들어가지키는것이좋을것이다”라고극구말렸고,또한충주목사‘이종장’도“적은승승장구하고있으니우리가넓은평지에있는것은병법상옳지못하고험한곳을지키는것이제일좋은방책이다”라며진언을했으나신립의고집을꺾지는못했던것이다.


미쳐도단단히미친병조판서다.열세분의전임(前任)병판대감들이시임(時任)병판인윤광웅에게전쟁시미군으로부터작전통제권환수추진중단을촉구한데대하여,자신보다훨씬경험이많고또지난날이나라조국강토를지키기위해불철주야애쓰신선배병판그것도열세분의선배님의조언을무시하고“오래전에병조판서를한분들이라우리군대발전상을정확히이해하지못해작전권환수를염려하는경향이있다”고했단다.


이얼마나어리석고자신을모르는만용과오기를부리는것인가.신립은약간의북쪽오랑캐를진압한허접한실력으로조총을들이대는왜적에게덤볐던만용과오기를부리다저만죽은게아니라8천의아까운인명을희생시킨것이다.육군병장출신의노무현의국방에대한개념이얼마나확립되어있을까?조기경보기몇대들여오고신형전투기몇대가청와대를보호해줄것으로착각하고있는것은아닐까?청와대구중궁궐에서그런노무현의국방의개념이시임병판윤광웅을비호하는착각이들게한것은아닐까?

탄금대에서죽거나청와대에서죽거나죽고싶은놈은저희들만죽으라는얘기다.대한민국이세계만방에당당히설수있는초석을다지고주적앞에서촌치도물러서지않고맞서온대선배요경험많은전임병판대감들의충고를한마디로폄하하는가?탄금대의신립은이미고인이된사람이라그렇다치고청와대윤광웅은대가리붙어있는동안그직에서물러나백성의생명과재산을제대로지킬수있는분으로그직을바톤터치하기바라는마음간절한아침이다.저런X이병조판서라니나라꼬라지가요모양요꼬라지지…이런!빌어처먹을놈의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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