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일기: 장모님 그 후(3부)

미리 밝히지만 정확하게 지난 17일부터 꼭 일주일간 내겐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고 오랜만에 행복을 만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장모님으로부터 해방이 되었기 때문이다. 뭐, 장모님이 곁에 계신다고 해서 나 하고 싶은 대로 못하는 것은 아니나 어떨 땐 괜한 미안함? 죄스러움? 암튼 표현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오묘한 감정들이 머릿속이나 가슴 한 쪽에 자리하고 있었지만 지난 일주일간은 그런 것들을 모두 내려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해야 하나? 그 행복이 딱 일주일 만에 깨지고 만 것이다. 그 섭섭함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서울 집에도 갔었고 또 북한산에도 올랐던 것인데……

어쨌든 나의 좌 뇌와 전두엽의 활약에 힘입어 장모님 입장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한 결과 나는 급히 아내를 불렀다.“진이 엄마! 지금 처형에게 전화 좀 해 봐! 그리고 그 고모님 꼭 모시고 내려오라고 해!”나의 이런 태도에 아내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내가 무슨 쇼크를 먹은 사람처럼 보였나 보다.“아니!? 그게…무슨…갑자기…”라며 말을 잇지 못한다.

그 모습에 나의 장황한 설명이 시작되었고 요약을 하면“장모님 처지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게 잘못 된 생각일 수 있다. 더구나 자기(아내)가 없으니 쏟아 부을 데가 없다. 즉 이곳 생활에 대한 불편함, 혹시라도 있을 나에 대한 불만, 자식과 며느리에 대한 욕지거리 등등‘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칠 데가 없으니 오죽 답답하시겠느냐. 따라서 그 고모님이 오시고 대화상대가 되 주시면 장모님이 일시적으로나마 편해지거나 치유가 되지 않을까?”라는 나의 설명에, 처형의 돌발행동으로 분기탱천해 있던 나에게 미안하고 죄스러워 자신이 죄지은 양 괴로워하던 아내의 얼굴이 밝아지며 만면에 미소까지 번지는 듯했다.

물론 당연히 처형에게 전화를 했고 다음날 자초지종의 설명을 듣고 고모님을 모시고 온 처형은 마치 지가 무슨 개선장군처럼 보무도 당당히 오. 백가장(吳. 白哥莊)에 입성을 하게 되었고 그렇게 고모님이 이곳에 오신 후, 미리 밝혔지만 나의 행복한 시간이 시작된 것이었다.

고모님, 같은 연세라도 처음 뵌 고모님은 풍문에 들은 것처럼 장모님과는 근본이 달랐다. 어디 고녀인지 고등교육을 받아서 인지 말씀에 교양이 묻어났다. 그리고 과연 부자 집 마님이라 그런지 품위가 있었다. 보다 특별한 것은 새우허리처럼 휜 장모님과는 달리 꼿꼿했고 풍채도 좋았으며 머리(두뇌)가 전혀 녹슬지 않은 맑은 정신 그리고 청각도 훌륭하여 나와는 대화가 됐다.

딸만 셋을 두었는데 큰 사위는 某지방은행의 지점장으로 셋째 사위는 모피수출입을 크게 했었고 마지막 둘째 딸은 성악가로 미국에 이민을 가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흥하는 것은 힘들지만 망하는 것은 순간이 아니던가? 그 집안도 IMF를 맞으며 큰사위는 큰사위대로 조기 퇴출 되었고 막내사위는 막내사위 대로 칼바람을 맞았다는 것이다.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막내사위의 빚보증을 서 주었다가 99간은 아니더라도 사직동 그 너른 고택이 경매에 넘어가고 완전 파산이 되어 그 여파로 고모부 되는 양반은 그만… 고모님은 현재 분당에서 단칸방에 거주하며 사시는데 다행히 이런저런(극빈자로..)국가의 혜택으로 살아가고 계신다는 것이다.

사실 고모님이라는 양반은 장모님에 대해 너무 잘 알고 계셨다. 열다섯 되던 해 백씨 집안에 민며느리로 들어와 병신 남편을 섬긴다는 이유로 오히려 시집에서 극진할 정도의 대접을 해 주었고 특히 시어머니 되시는 처조모님은 그런 며느리와 사돈댁에 때만 되면 바리바리 보내주었고 심지어 20 전에 곳간열쇠까지 맡겨놓자 집안의 재물들을 친정으로 퍼 나른 일이며 그래도 어찌하지 못하고 열불이 나면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키시고 울분을 삭이시다 돌아가셨다는 얘기며…. 속속들이 아내로부터 듣지 못한 얘기까지 해 주셨다.

고모님이 오시고 이틀째다. 그날 아침 밭으로 나가는 나를 장모님이 툇마루에 앉아 계시다 불러 앉힌다.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