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1부)

잘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끌어 모을 수 있는 건 다 끌어 모아 사업(하꼬방 같은 자영업)이라는 걸 시작했지만 1년이 못 되어 몽땅 털어먹고 룸펜이 되었다.

할 일은 없지만 시간은 많은 때이라, 그날은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되 노래가사처럼 명동 길을 걷다가 전 직장의 영업일 때문에 알게 된 일본인(바이어)을 우연히 만났다. ‘롱 타임 노씨.. 하우 아 유.. 오겡끼데쓰까??’암튼 서로가 반가워 이런저런 인사를 나누었는데, 그 양반 갑자기‘요즘 뭣 하냐?’ 쪽 팔리지만 숨길 상황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벤치 호터,,, 방 딲개…’솔직히 얘기 했다. 그런데 이 양반 나를 가련하게 여기기는커녕 눈을 반짝이며 그 거 잘됐다는 식으로 얘기하며 내일 모시에‘도큐호텔(지금은 뭐가 됐는지 모르지만 남대문 시장입구 맞은 편 건물 80년대까지 호텔이었음)’몇 호실로 가 보라는 것이었다.

재일교포였다. 오사카에서 게이샤 하우스(요정)를 운영하는 양반이었다. 지금이야 그렇지 않지만 한국이나 일본이나 요정이 정치의 본산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 요정은 일본의 한다하는 정객들의 단골집이었다.

70년대 말‘하리마오 張’사건이라는 게 있었다. 밀수 왕이었는데 이 사람이 밀수 뿐 아니라 홍콩에다 요정을 차려 놓고 우리의‘미코 출신級’ 아가씨들을 수입(?)하여 현지에서 영업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현임 대통령인 박근혜(국모님 흉탄으로 돌아가시고 퍼스트레이디 역할 할 당시)아씨가 그 얘기를 어디서 주워듣고 엄명을 내려 아가씨 금수조치를 한 적이 있었다.

국가의 위신을 까먹는다는 취지에서 금수조치를 내렸으나 그 많은‘미코 출신級’아가씨들은 졸지에 직장을 잃게 되었는데 다행히(?) 오사카에서 요정을 하고 있던 장 회장(우연히 이 양반도 장씨였고 우리는 회장님으로 불렀다)님이 그 길을 터 주게 된 것이다. 나는 가보지 않았지만 그곳을 업무 차 다녀온 사람들 얘기에 의하면 그 요정이 어마어마하게 크고 잘 꾸며져 있었단다. 또한 한다하는 일본 정객들의 단골이라 장 회장님은 큰돈을 벌었고 모국에 기여하는 의미로 사업체를 하나 만들기로 한 것이 내가 전 직장에서 경험한 아이템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하늘이 내린 기회였다. 할 일 없이 명동은 왜 갔으며(내가 절대 할 일 없이 명동을 갈 사람이 아닌데… 뭔 일이 있었겠지….)또 그렇게 우연히도 지난날의 일본인 바이어를 만난 것도 그리고 어쩌면 내 경험이 필요한 사업을 장 회장님이 구상하고 있었는지….하나 같이 보통의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그날 면접을 마치고 다음 날부터 출근을 하기로 했다.

공장은 경남 사천 곤양면이라는 곳에 위치해 있었고 사무실은 동부 이촌동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100평대의 고급빌라였다. 별도의 사무실을 내 준 게 아니라 그 중 너른 방을 쑈룸(샘플실)겸 사무실로 했는데, 재미난 것은 그 때 세상에 태어나 할 수 있는 눈 호강을 한꺼번에 다 했다는 사실이다.

미리 밝혔지만 모두‘미코級’ 아가씨들이 일본으로 진출하기 위해 면접을 보러 오면 쭉쭉빵빵…정말 눈이 휘둥그레지고 경국지색이라는 얘기가 괜히 생겨난 게 아니구나 할 정도의 미인들이 줄을 섰었다. 그런 날은 사무실에서 안 보는 척하며 유리창을 통해 면접광경을 훔쳐보며 눈요기를 한껏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들이 돌아간 다음 담당하는 양반(형님 형님하고 따라 다녔음)과 그녀들의 이력서를 살펴보면 정말 이런저런 지방‘미코 진선미’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

합격요건은 인물도 출중해야 했지만 일본어를 할 줄 몰라야 했다. 둘째 창이든 악기든 특기가 있어야 했다. 그런 재주가 없음에도 정말 아까운 미녀는 별도의 교습 시스템이 있었다. 이렇게 선발된 미녀들은 일본 현지에서 길어봐야 6개월 정도의 근무를 끝으로 해고(?) 아니 퇴직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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