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2부)

이 시각에도 인터넷을 접속하면 포털이든 신문이든 외국어를 빨리 배울 수 있는 방법 특히 영어 빨리 배우는 방법에 대한 광고가 뜬다. 아무리 떠들고 씨부려도 왕도(지름길)는 그 언어에 해당되는 현지에 가거나 그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과 부딪히는 게 가장 빠른 길이다. 지난날 파주 용주골 아가씨나 부산 하야리야 부대 인근의 아가씨들이 알파벳은 몰라도 토막 영어를 구사할 줄 아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핀트가 많이 빗나간 얘기지만, 나는 떠듬떠듬 중국(특히 산동 방언)말을 흉내 낸다. 그래도 의사소통은 충분하다. 단 한 번도 정식으로 중국어를 배운 적 없지만 지금 정도의 중국어 구사를 중국현지에 상주하며 6개월 만에 익힌 것이고 그 6개월이 전부 이지만 전문용어나 문학적 철학적인 것 빼고 중국인과의 일상적 대화를 넉넉히 할 수 있다.

어제 본 썰의 마지막 부분에 미코級 아가씨들의 일본 진출 시의 합격요건에 인물도 출중해야 했지만 오히려 일본어를 할 줄 몰라야 했다. 둘째 창이든 악기든 특기가 있어야 했다. 그런 재주가 없음에도 정말 아까운 미녀는 별도의 교습 시스템이 있었다. 이렇게 선발된 미녀들은 일본 현지에서 길어봐야 6개월 정도의 근무를 끝으로 해고(?) 아니 퇴직을 해야 한다고 끝을 맺었다.

아무리 머리가 나쁘고 둔재라도 6개월 정도면 귀가 뚫린다는 것이다. 귀가 뚫린다는 것은 입이 열린다는 신호이고 아무리 입이 무거워도 들은 얘기 아니 옮길 수 없는 게 인지상정이고 세상만사인 것이다. 특히 정객 정치꾼들의 얘기라면 더더욱. 오늘날 이 땅에 벌어지고 있는 최순실 사태도 따지고 보면 같은 말을 구사하는 년놈끼리 개/새/끼 한 마리 때문에 벌어진 시비가 단초가 됐다고 하지 않든가. 일본 땅 오사카 요정에서 일하며 온몸으로 외화벌이에 앞장 선 우리 아가씨들의 6개월 정년(?)은 그래서 생겨난 규칙이고 노동계약 이었든 것이다.

그래도 그곳엘 서로 가려고 했던 이유는 3개월에서 6개월 정도만 주재해도 꽤 거금을 저축하고 귀국할 수 있었고, 그곳(요정)의 문물을 익히고 배워 귀국하여 일본식 요정을 개업하는 아가씨(70년대와 80년대는 일본인 관광객들이 요즘의 중국 유커처럼 우리네 요정을 먹여 살리다시피 했다)도 있었고 잘나가는 요정의 새끼 마담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었다. 당시 일본관광객 상대로 영업(개업)하는 요정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성황을 이루었고 몇 달 배운 일본어가 요긴하게 쓰였기 때문에 취업 걱정 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이런 요정계의 속사정을 조금 알게 된 동기가 참 아이러니도 하다. 언젠가 잠시 피력했지만 직장생활을 하며 무역파트에서 근무를 했다. 영업(수출 내수 포함)이라는 게 입만 가지고 하는 게 아니다. 소위 접대라는 게 부수적으로 따르게 되어 있다. 70년대 80년대 접대의 대세가 극장식 식당이나 아니면 요정이었다. 일본인은 두 말 할 것도 없고 파란 눈의 바이어도 우리 식의 요정 접대를 무척 선호하고 경이로워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외화 한 푼이라도 더 벌어들이겠다고 억지로 술을 마시고 일본인 앞에서는‘부루 라이또 요코하마’를, 파란 눈의 바이어 앞에서는‘My way 아니면 Am I that easy to forget’캐싸며 내용도 제대로 파악 안 된 倭노래와 팝송을 부르고 재롱을 떨어가며 그렇게 이 땅의 갱제를 위해 일 하며 조국건설에 일조를 해 왔는데, 여태 그렇게 지켜온 조국인데, 지금 종부기 놈들이 이 땅을 이 나라를 털도 안 뽑고 먹어 치우려고 하는 것이다. 아이고! 흥분해서 정말 핀트가 많이 빗나갔다.

나를 오사카에서 요정을 하는 교포 장 회장님을 소개 했던 일본인의 이름을 아직도 기억한다. ‘이쓰미 상’이라고 불렀다. 그이 명함에는 자신의 이름 밑에(It’s me)라고 부기(附記)를 했기 때문에 기억하기가 좋았고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바로 그 이쓰미 상이 내가 접대해야 하는 대상이었고 함께 많이도 요정을 출입했으며 그에게 현지처까지 소개 했던 것이다. 그랬던 이쓰미 상이 내게 이런 은혜를 아니 보답을 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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