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일기: 엄마와 옥수수.

지금은 없어졌지만 정부종합청사 뒤쪽 종로구 내자동엔 자그마한 내자호텔이라고 있었습니다. 9.28수복일 중앙청에 자랑스러운 태극기가 오르기 전 인민군 마지막잔당은 그 내자호텔에 은폐하여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그곳은 놈들의 아지트였고 마지막 발악을 하는 인민군을 향하여 국군은 박격포를 날렸던 것입니다. 불행히도 그 중의 한 발이 내자호텔 뒤쪽에 자리한 저희 집으로 날아와 버린 것입니다. 6.25가 발발하자 미처 피난을 가지 못했던 저희가족은 인민군치하에서 벗어나기만 이제나 저제나 기다렸는데 뜻밖에 박격포탄이 먼저 날아와 버린 것입니다. 불행의 그 한 발 박격포탄으로 어머니는 왼팔이 겨우 붙어있을 정도의 장애가 됐고, 당시 수송초등학교(지금의 종로구청자리)2년이든 형님은 오른쪽다리(대퇴부)가 잘려나갔습니다. 세 살이었든 저 역시 척추 쪽에 파편을 맞았다고 하는데 이날까지 아무런 이상이나 불편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불행은 또 다른 불행을 낳는다죠? 그로 인해 병신이 되 버린 형님은 차치하고라도….저희 조모님께서 보통 분이 넘으셨습니다. 왼팔을 거의 못 쓰는 며느리를 학대하며 지독한 시집살이를 시켰습니다. 한쪽 팔이 없다 시피 한 며느리는 이미 노동력의 반감이고 아무리 찌든 것이라지만 살림살이는 해도 해도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거죠. 그런데 문제는 그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조모님은 저희를 끔찍이도 귀여워하는 게 아니라 미워했습니다. 며느리는 미워도 손자손녀는 그렇지 않으실 텐데 저희 형제들을 뱀 보듯 냉정하셨습니다. 심지어 다리 없는 착하디착한 형님에게“그때 죽었어야하는데…”를 입에 달고 다니셨습니다.

 

피난지의 저희 집 담장 안에는 조그만 텃밭이 있었고 그 텃밭에는 우리가족들이 먹을 수 있을 정도의 남새가 철철이 언제나 자랐습니다. 더불어 감나무.돌배나무.호두나무.살구나무.앵두.자두.포도넝쿨 등등의 유실수도 있었고 특히 여름철이면 옥수수를 늘 심었기에 그 옥수수대가 담장노릇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얼마나 목가적인 분위기입니까. 옥수수가 익을 무렵이면 여름방학이 시작되었죠. 그리고 포도도 거뭇거뭇 익어가기 시작합니다. 옥수수가 익어가고 포도가 익어가는 계절은 저와 형님은 수난의 계절이 되는 겁니다. 조모님은 어머니를 통하여 그 옥수수와 포도에 절대 손을 못 대도록 엄명을 내립니다. 그것은 연례행사나 다름없었고 저희 형제는 어머니의 고충을 이해하고 결코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제가 성인이 되고 한 가정을 꾸려나가는 가장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가끔씩 제게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너희가 참 천연덕스럽고 일찍 철이 들었어…”라고. 할머니가 그토록 매년 엄명을 내리며 아끼든 옥수수와 포도의 쓰임새는 다른데 있었습니다. 제게는 저 보다 한 살 많은 사촌형이 있고 또 한 살 아래인 고종사촌이 있습니다. 둘 다 외지에 살았기에 방학이면 저희집으로 모두 옵니다. 사촌형은 작은아버지의 장남이었고 작은아버지는 국책은행(산은)의 중간간부쯤 되셨으니 꽤 유복한 터였고, 고종사촌 또한 유복한 집안의4대 독자로서 금이야 옥이야 했었답니다. 아~!또 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시집 안 간 과년한 막내고모가 있었는데, 이 여인네가 팔 못 쓰는 올케에게 시집살이를 가중시키는 그야말로“때리는 시어미 보다 말리는 시누이”역할을 단단히 하는 그런 고모가 있었답니다.

 

그런 그들이 한데모여 적당히 익은 옥수수를 찌고 포도송이를 따는 모습을 보면 저와 형님은 슬그머니 동구 밖으로 나갑니다. 그리곤 두어 시간 놀다 들어와 마당에 널브러진 옥수수대와 포도 껍질을 바라보며 입안에 고이는 침을 그들에게 들킬까 겁내하며 조용히 삼키곤했답니다. 그런 광경을 목격하는 우리 어머니의 심정이 어떠했겠으며 먼 뒷날 제게“너희가 참천연덕스럽고 일찍 철이 들었었어…”라는 말씀을 가끔씩 하셨던 것입니다.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려 보겠습니다. 저는 업무상 매월1-2회 중국을 드나듭니다. 중국의 호텔뷔페식단(호텔 비에 포함된 조식)은 지방에 따라 대동소이 합니다만 어떤 호텔의 식단이든 똑 같은 게 하나 있습니다. 만두(딤섬포함)종류와 삶은 옥수수가 그것입니다. 저는 식사를 할 때 마다 꼭 옥수수 한 덩이를 접시에 담습니다. 그리곤 지난날을 회상하며 다른 어떤 음식보다 먼저 천천히 음미하며 먹습니다. 일종의 눈물어린 옥수수인 셈이죠. 한 번은 사촌형이 빠진 사촌형 식구와 저와 제 마누라와 중국을 함께 간 일이 있었죠. 다음날 아침식사 때였습니다. 우연하게 사촌형수가 다른 맛난(?)것들은 제외하고 옥수수를 몇 덩이 접시에 올려놓고 먹는 것을 보고 불현 듯 지난날 할머니와 그리고 사촌과 고모들에 대한 생각이 떠 올라 사촌형수에게“눈물의 옥수수”얘기를 해 주었답니다. 그런 사정을 듣는 형수는 처음 듣는 얘기라며 깔깔거리고 웃다간 종래 제 눈가의 슬픈 흔적을 발견하고 함께 눈물을 찔끔거리기까지 했답니다. 그리고 제가 과일을 썩 좋아하지는 않습니다마는 과일 중에 특히 포도를 제일 싫어한답니다. 널브러진 옥수수 대와 마당에 흩어져있는 포도껍질의 잔상이 뇌리에 아직 남아 있나봅니다. 손수건 없이는 못 볼 지난날의 얘기를 계속하려니 자꾸 눈물이 나려고 합니다. 아련한 어릴 적 추억입니다마는 며느리 밉다고 저희 형제를 박대하시던 할머니도, 고초 당초처럼 매운 시집살이를 하셨던 어머니도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 역할을 단단히 했던 고모도, 이런 정황에서 우유부단(나중에 철들고 보니….)하셨던 아버지도 이미 이 세상분들이 아닙니다. 그렇게 며느리와 그 자식들을 박대하시든 할머니가 어느 날 중풍으로 쓰러지셨습니다. 7년 간 대소변을 받아내시며 병간호를 하신 분은 그래도 울 엄니 셨다는 얘기를 끝으로 썰을 마치겠습니다.

 

2007년 12월 어느 날 블로그에 올린 썰입니다.

 

 

에필로그,

사실 설 차례(茶禮)를 지내려고 서울 집에 어제 밤늦게 왔습니다. 설이라고 아이들 오가고…복잡하고…저는 차례나 기제사 때 지방을 쓰지 않고(워낙 불학무식하기도 하지만 글씨가 영…)사진을 모십니다. 이 아침 네 분(조부모 부모)의 사진을 싸온 보자기를 풀다가 먼저 이 썰을 회상해 봅니다. 어제 올린 산골일기에서 부모님 돌아 가셨을 때 눈물 흘리지 않은 것을 얘기 했습니다마는,,,

 

특히 어머니는….지금 생각해 보면 그랬습니다. 불편한 몸으로 시집살이를 하시며 그 모진 박해나 서러움을 자식들에게 풀었던 것입니다. 아마 요즘처럼 피임을 할 수 있었다면 우리 7남매는 태나지 않았을지도 아니 625이후 제 밑의 3남매는 더더욱. 할머니나 고모의 박해 뒤 꼭 분풀이를 제게 했던 겁니다. 만만한 게…. 걸리적거리는 집안의 똥개처럼. 저라도 없었더라면 우리 엄니 보따리 싸서 튀셨을 겁니다. 그런 어머니의 분풀이를 온 몸으로 받아 낸 제가 불효잡니까? 어릴 때 하도 조 터지며 흘린 눈물 때문에 샘이 말라붙었던 겁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시어요. 지난 한 해 뜨거운 성원과 격려 감사합니다.^^

2 Comments

  1. 데레사

    2017년 1월 27일 at 9:21 오전

    그 내자호텔이 지금의 서울경찰청 입니다.
    서울경찰청 이전에는 서울경찰학교가 있었구요. 그때는 내자호텔의
    건물은 남아 있었어요. 아마 미군시설이었는지 우리는 출입금지
    였던 기억이 납니다.

    옛 시어머니들은 며느리를 왜 그렇게 고약하게 대했는지….
    저 역시 짦게나마 엄청 고된 시집살이를 했거든요.
    시어머니가 빨리 돌아가시지 않았으면 이혼을 하던지
    도망을 치던지 했을 겁니다.

    설명절 잘 보내세요.
    복많이 받으시고 무엇보다 건강 하십시요.

    • ss8000

      2017년 1월 27일 at 9:33 오전

      누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맞습니다.
      그 내자호텔이 관광호텔이 아니고
      미군들 대기소(휴가나 전.출입)였습니다.

      정확하게는 지금의 기동대 자리지요.
      누님이 그곳에도 근무 하셨군요.^^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