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일 관계를 알아 보자(10)

일본을 배우고, 일본을 이해하여 과거 어느 때보다 망가진 한. 일 관계를 재정립해 보자는 의미(물론‘이란격석(以卵擊石)’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겠지만…그래도 나는 시도해 보련다.)로 이곳 조선일보 토론마당에 글을 올리고 있다. 혹자는‘일본을 배우자’라는 말 한마디에 벌써 빈정이 상하고 오장육부가 뒤틀릴 것이다. 실제 그런 식의 표현이나 야지가 들어오고 있다.

일본에 배울 게 무어냐 이런 식이다. 지난날 일본 보다 문화도 앞서있었고 그런 것들이 한반도에서 건너갔고, 현금에 이르러 한류가 일본 뿐 아니리 세계를 지배하는데 하필이면 일본에 무얼 배울 게 있느냐다. 일본은 배움의 대상이 아니라 정복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자는”일본이면 뻑 가는 병규X , 머 뜯어먹을 끼 있다, 생각하고 알랑 뽕을 떠는 구나? “라며 비아냥 거린다. 참… 이정도 되면 무식은 고사하고 몽매하기까지 한 자들이다. 이런 자들이 곧 한. 일 관계를 악화시키고 한 편으로는 남북통일을 저해하는 이 땅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아니면 첨부터 없어도 될, 밥이나 축낼 잉여인간들이다.

철들고 소위 쌍8년(단기4288년 서기1955년)도 초등학교입학 했을 때 일제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었다. 담임선생님은 그 때도 죽도(竹刀)를 옆구리에 차고 시위를 했었다. 혹시라도 선생님 눈에 벗어나면 그 죽도가 섬광(? 정확하게는 초음속의 속도)을 번쩍이며 대가리로(초등1학년이 철이 들면 얼마나 들었다고…)몸뚱이로 둔탁하게 날아와 꽂혔다. 또 엄동설한에 전교생 호주머니를 깁고 다니라 했다. 손이 아무리 시려워도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니는 것은 정신 상태불량이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런 것들은 일본의 압제 때도 있었던 일이라는 것이다. 지금은 다 잊어 먹었지만 웬만한 일상생활의 단어 특히 명사는 거의(벤또, 다꾸앙, 댄뿌라…)일본말 일색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그런 일본식 박해가 정신통일에 많은 보탬이 됐다. 오늘날을 얘기하면 59년 개띠니 베이비부머 세대를 논하지만, 그 전의 세대들이 한 겨울에도 손을 호호 불어가며 정신통일을 한 덕분에 오늘을 영위하는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얼마나 참혹한 세대였던가? 625발발과 휴전이 성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으니 뭣하나 성한 게 없었고 뭣하나 풍족한 게 없었던 세대들이다. 당시 우리의 선생님들은 무조건 일본과 일본인을 악마로 규정짓고 그들을 미워하고 침을 뱉어야 잘하는 것으로 가르쳤다. 그런 가르침을 받고 자랐으니 이 세상엔 두 종류의 악마가 있는 것으로만 알고 자랐다. 소위 빨. 갱. 이와 왜놈이라는 두 괴물들 말이다.

64년 일본 도쿄 올림픽이 열리던 해 고등학교 입학 하던 해다. 일본에 관한, 학교 선생님과 교과서에 나열된 부정적이고 반일 정서의 교과 외에는 알 길이 없는 일본, 지금처럼 tv를 비롯한 전자제품이 흔치 않든 그 시절 진공관 라디오로 전해지는 일본의 문물과 문화를 듣고 나는 일본이 아주 나쁜 나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오히려 그 때 우리의 막무가내 식 교육이 얼마나 폐해를 주는가를 생각한 계기도 되었다.

일본과는 국교정상화도 되지 않아 왕래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어쩌다 일본으로부터 들려오는 뉴스라는 게 어디어디서 밀항을 시도하다 붙잡혀‘오무라(?)수용소’에 몇 명의 우리 사람이 수용 됐다는 뉴스정도가 일본과 관계되는 소식이었는데 그해 6월에 서울 장안엔 대규모 시위가 연일 열리고 있었다. 이른바‘한일협정 반대’시위 그것이었다.

내가 이런 글(일본을 배우자)을 쓰 내려가는 동안 이곳 토론마당에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동지 내지 원군(반대로 나 자신이 그 분의 동지 또는 원군일 수도…)한 분이 계신다. 그 분의 글 가운데 나로선 알 수 없었던 그래서 정말 참고가 되는 글의 일부를 소개해야겠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 때

<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 및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

이 협정에서 일본은 한국에 대해 조선에 투자한 자본과 일본인의 개별 재산 모두를 포기하고, 3억 달러의 무상 자금과 2억 달러의 차관을 지원하고, 한국은 대일 청구권을 포기하는 것에 합의했다.(중략)

 

위에서 보듯이 1965년에 일본에 뭘 청구할 권한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

되었습니다. 그 때 8억불 보상 받았습니다.(하략)

 

전 년도 우리의 수출 총액이 $4,955억 이란다. 매년 11월30일이면 수출의 날 기념행사를 정부주관으로 하고 있다. 우리가 최초로 1억불 수출을 이룩한 때가 바로 한일협정을 눈앞에 두고 나라가 시끄러웠던 1964년도 11월 30일이다. 그날을 기리기 위해 매년 11월30일을 수출의 날로 정해서 행사를 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일본으로 받은 8억불은 오늘날의 가치로 따지면 얼마나 될까? 각자 상상해 보자.

 

2 Comments

  1. 데레사

    2017년 3월 8일 at 9:06 오전

    그건 나도 기억해요.
    흔히 김.오히라 메모라고 했죠. 그때 일본 총리인 오히라와
    김종필 총리간의 메모라고 보면 됩니다. 그 메모후 협상이
    이루어졌던 기억이 남아 있어요.

    이제는 과거에 매달리기 보다 앞을 바라보며 한.일 관계를
    다시 정립 해 볼때가 되었다고 봅니다.

    • ss8000

      2017년 3월 8일 at 8:54 오후

      어쨌든 지금처럼 한. 일 관계를 유지 한다는 건
      양국이 모두 손햅니다.

      누가 누구를 이기자는 게 아니라진정한 선린 관계를 유지하며
      동북아의 평화를 유지해야 합니다.

      남북통일을 방해하는 가장 큰 세력이
      중국입니다. 중국을 견제 하기 위해서라도
      지난 날의 적인 일본과는 손을 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더욱 일본과 가까워 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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