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설(演說)과 낭독(朗讀)

여전히 예쁘고 조신해 보인다. 아니 이전(선수시절)보다 훨씬 예뻐졌고 그기에 원숙미까지 더 해 보인다. 아들 하나만 더 있었어도…아니한 말로 보쌈이라도 시켜서 며느리 삼고 싶은 마음이 절로 난다. 불세출(不世出), 좀처럼 아무 때나 세상에 나타나지 않을 어쩌면 대한민국에는 두 번 다시 태어나지 않을 히로인(heroine)일지도 모른다. 피겨스케이팅 세계 챔프 김연아 얘기다.

 

연설(演說)의 사전적 의미는 대중 앞에서 자기의 주의나 주장 또는 의견을 펼치는 것을 말한다. 그기에 더하여 명연설은 대중에게 어필하고 감동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또 조리 있고 힘차게 거침없이 말함으로 청중을 감동시킬 수 있는 웅변(雄辯) 또한 연설(演說)의 하나다.

 

웅변하면 생각나는 게 516혁명 이후 가장 곽광을 받고 왕성했던 게 웅변대회였다. 특히 반공. 승공 웅변대회는 국가적 행사처럼 성대하게 치루었다. 그리고 모든 웅변의 말미에 두 팔을 번쩍 들고 꼭 등장시키는 문구가“이 연사는 강력히 주장(또는 외치는..)하는바 입니다.”였고, 항상 그 말끝엔 우레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었다. 청중에게 공감을 요구하고 감동을 주기 위함이다.

 

지금은 소나 개나 정치한다는 또는 정치가를 사칭하는 작자들 때문에 웅변대회가 많이 없어지거나 줄었지만 선거철이 되면‘유세(遊說)’라는 단어가 항상 등장한다. 웅변을 잘하는 연사가 어떤 입후보자 대신 명연설을 펼침으로 청중의 공감을 받고 표(票)를 얻어 냈다. 그러나 유세란 단어는 사기성이 짙다. 전국7웅 시대 소진과 장의가 합종연횡을 부르짖고 7국을 돌아다니며 교묘하게 왕과 백성들에게 사기 친 것에서 유래 한다. 그런 부류들을 유세객(遊說客)이라고 불렀다.

 

웅변이든 연설이든 연사의 의사(뜻)를 청중에게 전달하고 설득하여 끝내는 감동시킴으로써 그 목적을 달성 하는 것이다. 며칠 전 방한하여 국회에서 명연설을 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진정한 연사(演士)이고 명연설가 이다. 그의 연설은 도도히 흐르는 강물처럼 막힘없는, 그야말로 감동을 주는 웅변이었다.

 

그의 연단 좌우에는 텔리프롬프터(teleprompter) 즉, 연설의 원고를 읽을 수 있는 전자장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명연설 도중에라도 트럼프 대통령은 단 한 번도 텔리프롬프터(teleprompter)를 보는 것을 나는 보지(알지) 못했다. 원고 자체를 숙지했거나 외웠을 것이다. 이 또한 명연설가의 재주고 덕목 아니겠는가?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주의나 주장을 머릿속에 입력해 두었기에 현하(懸河)같은 명연설이 됐던 것이다.

 

그기에 비하면 우리의 지도자들은 어떠한가? 아랫것들이 정성을 다 해 온갖 미사여구(美辭麗句)를 섞고 선동(煽動)문구를 유효적절하게 배치한 원고를 만들어 주지만 언제나 젬병이다. 특히 어떤 지도자는 마치 초등생이 선생님의 요청에 의해 자리에서 일어나 교과서를 읽는 것처럼 잔뜩 긴장하여 그렇지 않아도 허연 눈동자를 더 하얗게 좌우상하 굴리며 원고를 읽을 때 보면 무섭기 조차하다. 공감과 감동이 일어날 수가 없다.

 

유엔은 지난 13일 내년 2월 개최되는 2018 평창 동계올림픽·패럴림픽 대회 휴전 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리고 평창올림픽 홍보대사인 ‘피겨 여왕’ 김연아가 이날 결의안 표결 전 특별연사로 유엔 총회 연단에서 결의안 채택을 호소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장면을 두고 신문. 방송 등 모든 매체들은 “김연아’특별연사’로 연설”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김연아의 특별 연설(?)에 초를 치고 폄하자는 게 아니다. 아들 하나만 더 있었어도…아니한 말로 보쌈이라도 시켜서 며느리 삼고 싶은 마음이 절로 나는 전무후무(前無後無) 불세출의 히로인이지만 아닌 건 아니다. 며느리가 아무리 예쁘고 사랑스러워도, 아무리 팔이 안으로 굽어도 아닌 것은 아니다.

 

시종일관 눈을 내리깔고 원고를 읽어 내려갔다. 원고를 본인이 작성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연설이 아니고 단지 낭독(朗讀)일 뿐이다. 또랑또랑 소리 높여 글을 읽는 것을 의미하는 낭독 말이다.

 

문제는 아랫것들이 정성을 다 해 만들어 준 원고 읽는 것도 벅차 잇 사이로 바람이 다 새나가며 흰자위만 남긴 채 버벅 대는 문재인의 원고 읽기에 감동은커녕 빈정만 상하기에 해 보는 소리다. 그런 것 까지 연설이라고 한다면 차라리 주인을 위해 밤새 애 써는 개 짖는 소리가 명연설이다. 비록 현하(懸河)같은 웅변은 아니었지만 잔잔하고 호소력 있는 박근혜의 연설은 지금도 눈에 선 하다.

 

 

 

 

 

2 Comments

  1. 데레사

    2017년 11월 15일 at 8:04 오전

    박근혜 댜통령의 연설은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연설이었지요.
    김연아 선수, 아직 나이 어리고 연설경험도
    많지 않고 더우기 영어니 보고 읽을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래도 장하죠. 별 구설없이 은퇴후도 늘 노력하고 후배들 챙기는 모습이 사랑스럽습니다.

    • ss8000

      2017년 11월 15일 at 8:47 오전

      글쎄 그 아이의 행동을 폄하자나는 게 아닙니다.
      저도 지금 사랑스럽고 그 아이가 계속 아름다웠으면 합니다.
      영어 아니라 어떤 것이라도 그냥 읽는 겁니다.

      그냥 낭독.
      문재인도 그냥 원고 읽기만 하는 겁니다.
      낭독. 그래서 영설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푼 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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