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皇帝)의 밀명인가? 조공품(朝貢品)인가?

공전의 히트를 친 어떤 드라마 한 편으로 한적 했던 북한강의 섬 하나가 국제적인 명소로 자리 잡은 게‘남이 섬’이다.

 

원래 남이섬의 유래는 모반죄를 뒤집어쓰고 억울하게 처형당한 남이장군을 국법으로 묘 만드는 것을 금지했지만, 후손들이 몰래 실제 묘지는 화성군 비봉면 남전리 산 145번에 몰래 만들었고 그 묘를 공식적으로 밝히면, 묘가 훼손되고 경우에 따라 관계자들이 죽음까지 당할 수 있기에 가묘를 만들어 본래의 묘지를 지키고자 강원도 춘천시 남산면 남이섬에는 이름 그대로‘남이 장군’의 가묘와 추모비가 있다.

 

남이(南怡), 본관은 의령으로 조선의 개국공신인 남재(南在)의 5대손이다. 아버지는 남빈(南份), 어머니는 남양 홍씨(南陽 洪氏)이다. 아버지인 남빈은 조선의 제3대 왕인 태종(太宗)의 딸 정선공주(貞善公主)가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다. 조선의 제7대 왕인 세조(世祖)에게 남이(南怡)는 고종사촌의 아들인 셈이다.

 

남이는 13세 되던 해에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세조 때에 좌의정을 지낸 권람(權擥)의 딸과 결혼하여 남구을금(南求乙金)이라는 딸을 낳았으나 일찍 사별했고, 고성 이씨(固城 李氏)와 다시 혼인했다. 그러나 고부 간에 갈등이 심하여 1468년(세조 14) 왕에게 아내와의 이혼을 허락 받았다.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왕위에 오른 세조는 남이와 구성군(龜城君) 이준(李浚) 등 젊은 종친(宗親)들을 중용하여 원로대신들을 견제하려 했다. 남이는 세조가 1460년(세조 6)에 무인들을 등용하기 위해 실시한 경진무거(庚辰武擧)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며, 1466년(세조 12)에 실시된 발영시(拔英試)에도 급제하였다. 1467년(세조 13) 김용달(金用達)과 함께 포천(抱川), 영평(永平) 일대 도적떼의 토벌을 지휘했고, 그해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이준이 도총사(都摠使)가 되어 이끈 토벌군에 군관으로 참여했다. 진북장군(鎭北將軍) 강순(康純)의 휘하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하여 북청(北靑)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그 일로 행 부호군(行 副護軍)이 되었으며 당상관으로 임명되었다.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후에는 행 호군(行 護軍)이 되어 종성(鍾城)에 주둔하며 온성(穩城), 경원(慶原), 경흥(慶興) 등의 고을을 다스렸으며, 군공을 인정받아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으로 포상되었다.

 

1467년 중추부 동지사(中樞府 同知事)가 되었다. 이어 명의 요동군(遼東軍)이 남만주 일대에 거주하는 건주여진을 토벌하기 위해 조선에 파병을 요청해오자 강순, 어유소(魚有沼)와 함께 윤필상(尹弼商)이 이끄는 북벌군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그리고 그해 음력 12월 27세의 나이로 공조판서가 되었으며, 왕궁의 호위를 담당하는 겸사복장의 지위를 겸하였다.

 

1468년(세조 14) 음력 5월에 서현정(序賢亭)에서 열린 연회에서 술에 취해 세조에게 이준만을 편애한다고 실언하였다가 의금부의 감옥에 갇혔다가 다음날 풀려났으며 겸사복장의 지위에서 파직되었다. 그해 7월 세조가 이준을 20대의 나이에 영의정으로 임명하면서 남이도 공조판서와 오위도총부 도총관의 지위를 겸하게 했으며 8월에는 병조판서로 삼았지만 한계희(韓繼禧) 등 대신들의 반대로 9월에 병조판서의 자리에서 물러나 다시 겸사복장이 되었으며, 조부와 마찬가지로 의산군(宜山君)으로 봉해졌다.

 

그러나 1468년(예종 1) 10월 병조참지(兵曹參知) 유자광(柳子光)의 고변으로 역모의 혐의를 받았고, 그해 음력 10월 27일에 강순, 변영수(卞永壽), 변자의(卞自義), 문효량(文孝良) 등과 함께 저자에서 거열형으로 처형되었다. 그의 어머니도 다음날 거열형으로 처형되었으며, 딸은 한명회(韓明澮)의 노비가 되었으나 이듬해 외조부인 권람의 공이 참작되어 사면되었다. 이 사건을 ‘남이의 옥(獄)’이라고 한다.

 

남이는 1818년(순조 18) 음력 3월 10일에 우의정 남공철(南公轍)의 청에 따라 강순과 함께 사면되어 관작이 복구되었으며, 1910년(순종 3)에는 ‘충무’의 시호가 추증되었다.

(이상 두산백과 참조)

 

김관진 전 국방부장관이 구속 되었단다. 사이버사령부 정치 댓글 공작’ 사건으로 구속됐다는 것이다. …….(할 말 없음) 그가 역모 죄를 뒤집어쓰고 사지가 찢겨 죽은 남이장군만큼 국가에 공헌을 했는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그러나 역모를 벌인 것도 아닌 일국의 국방최고 사령탑을 굴비 엮듯 빵에 처넣는 게 과연 옳은가는 생각을 해 봐야 할 것이다. 총을 들고 쿠데타를 벌인 것도 아니고 정치 댓글 공작을 했다고 한 평생 군인으로서 국방에 이바지 해 온 4성 장군 출신을 잡범 역듯 엮어 만천하에 공개하는 문재인은 5년 후 천벌을 받고 최소한 그 자식 대까지 자신이 벌인 재앙을 면치 못할 것이다. 남이(南怡)를 참소(讒疏)한 유자광의 말로가 어떠했는지 평생을 머릿속에 넣고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아니다. 김관진 장관이 구속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중국 제1의 관영 매체 CCTV는 군의 사이버 여론 조작에 관여한 혐의로 구속된 사실을 전하면서 그가 박근혜 정부 시절 “사드 배치의 주역”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친중 성향의 중화권 매체인 둬웨이(多維)도 “김 전 실장의 구속은 ‘사드 배치 주도 세력 척결’이라는 메시지를 중국에 보낸 것”이라고 보도했다.

 

국내에선 당장‘사드보복’을 해제한 것처럼 호도하고, 필리핀 마닐라에서 시진핑과 리커창이 아직도 집요하게 사드철수를 주장하는 중국 측을 보면, 이번 김 장관의 구속 사태는 황제(皇帝)의 밀명을 받았거나 황제(皇帝)의 계하에 일국의 병조판서 목을 바친 조공(朝貢)물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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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참,, 참,, 할 말이 없다. 설령 댓글 지시를 했다고 치자, 저는 꿀오소리 홍위병을 동원하여 갖은 패악질을 부리는 느미…

4 Comments

  1. 비사벌

    2017년 11월 15일 at 9:50 오전

    오선생님 오랫만입니다.정말 개같은 나라입니다.
    이젠 조그만 희망도 포기했어요.

    • ss8000

      2017년 11월 16일 at 8:32 오전

      원장님 오랜만 입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개 만 같아도
      나라 걱정 않겠습니다.

      그래도 개는 사람 말귀를 알아 듣고
      이리 가라면 이리, 저리 가라면 저리 말이나 듣습니다.
      뭉가 정권은 개만도 못한 나라입니다.

      저는 이 달 말경 캐나다에 가서 20일 정도 묵을 계획입니다.
      딸 아이가 영주권이 나왔답니다. 아주 이주하기엔 1년여를 더 지나야 할 것 같고…
      그 사이 이런저런 정보를 보다 많이 수집할 계획입니다.

      정 이 나라에서 못 살 것 같으면
      딸아이와 함께 할 계획입니다.

      뭉가 정권이 소멸 되는 그 날까지….
      원장 선생님도 희망을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2. 데레사

    2017년 11월 15일 at 10:52 오전

    앞으로 이 나라에서 이름깨나 알려진 사람들
    줄줄이 잡혀 갈겁니다.
    적폐청산으로 묶어서.
    뉴스를 안볼수도 없고 보면 울화통이 터지고
    하네요.

    • ss8000

      2017년 11월 16일 at 8:36 오전

      요즘 뭉가느미 하는 꼬라지를 보면
      자취지화 즉 제 스스로 화를 불러 들입니다.
      진부한 얘기로 과유불급이라 하지 않습니까?

      눌리고 눌리면 반드시 커지는 곳이 있습니다.
      참다 참다 터지는 게 폭발력이 더 크고
      엄총나게 소리도 큽니다. 그날이 머잖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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