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산(緜山)으로 간 이문열 선생.

●중국 요순시대 허유(許由)는 나랏일을 맡아 달라는 말을 듣자 냇가로 달려가 귀를 씻었다. 소에게 그 물을 먹이려던 소부(巢父)귀 씻은 물이 더럽다며 소에게 물을 먹이지 않고 돌아섰다. 거지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알렉산더대왕이소원이 뭐냐고 묻자햇볕을 가리지 말고 조금만 비켜 달라고 했다. 그러나19세기 역사가 몽탈랑베르는우리가 정치에 관련을 갖지 않으려 해도 허사다. 정치 쪽에서 놔두질 않는다고 했다.

 

●새누리당이 정말 인기가 없다는 게 실감나기도 하고, 세상이 오늘날의 디오게네스나 허유를 가만 놔두지 않는다는 생각도 든다. 공천 받는 일에 사방으로 줄을 대고 목을 매는 사람도 있겠지만 국회의원 제의를 모욕으로 느끼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알아줬으면 한다. 설마 금배지 후보신청서를 흔들면 다들 파블로프의 개처럼 침을 흘릴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겠지만.

 

요즘 정가가 난리도 아니다. 국회의장이 사퇴를 하고 정무수석이란 자도 사퇴를 한단다. 사퇴를 하고 말고가 중요한 게 아니고 그 사퇴의 동기와 원인이 더럽고 토악질난다. 권력속의 권력을 돈으로 사려는 더러운 놈은 당연히 도태되어 두 번 다시 정가에 발을 들여 놓지 못하게 해야겠지만, 이런 일을 내부 고발한 놈도 무슨 목적으로 그런 사실을 이제야 하는지? 그 동기와 목적이 순수하지 못했다면 이놈 역시 파렴치한 놈이긴 마찬 가지다. 이런 개xx들이 집권여당의 국개의원이 었으니 삼천리금수강산이 빨간 물로 차고 넘쳐흘러도 대청소 한 번 하지 못하고 종래는 대한민국을 망치는 원흉들인 것이다. 각설하고….

 

면산(緜山)은 충신 개자추가 더럽고 혼탁한 세상(정치)을 피해 도망쳤던 곳이다. 진부한 얘기지만 개자추(介子推)는 춘추오패(春秋五覇)중의 한 사람으로 천하를 호령했던 진문공(晋文公)의 충신이었다. 진문공(중이)이 부왕과의 반목, 형제간의 암투로 고국을 떠나 망명길에 올라19년 동안 열국을 배회하든 어느 날 공자중이가 배가 고파 헛것이 보이며 아사지경에 놓여 있을 때 개자추는 어디서 생겼는지 고깃국 한 그릇을 정성스레 바쳤고, 그 고깃국의 출처를 알길도 없이 맛나게 먹은 중이가 그때서야 자초지종을 알아보니, 그 고깃국은 개자추의 허벅지 살이었던 것이다. 넓적다리 살을 베어 임금에게 먹였다는 할고담군(割股啖君)이라는 성어는 이때 생긴 것이다.

 

어쨌든 갖은 고초를 겪고 왕위에 오른 진문공이 논공행상을 벌일 때 개자추는 괴나리봇짐에 연로하신 어머니만 들쳐업고 면산(緜山)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그런 사실을 뒤늦게 안 진문공이 면산으로 달려가 개자추를 애타게 찾았으나 개자추는 더 깊은 골짜기로 숨어들었던 것이다. 개자추는 처음부터 벼슬도 명예도 탐하지 않았으며 다만 국가와 자신의 임군에게 충성을 다 했을 뿐이다.

 

좀 다른 얘기지만, 오늘의 보수논객으로 또는 보수의 맨토로 늘 열과 성을 다해 왔던 소설가 이문열 선생이4월 총선을 앞두고 새누리당 일부에서 비례대표 영입대상으로 거론되자모욕감을 느낄 정도로 불쾌하다고 했단다. 이런 영입제의는 비단 이번뿐만이 아니었다. 걸핏하면 무슨 때만 되면 달거리 돌아오듯 거론되어 왔고, 그럴 때마다 고사를 했건만 또 이 따위 헛소리가 떠 돌고있는 모양이다. 아울러그동안 보여준 보수정치 후원자 역할이 겨우 이 따위 자리를 따내려는 것으로 인식되는 게 너무 속상하며 정치를 한다고 이름이 오르내리고 웃음거리가 되는 게 화가 난다고 했다는 것이다.

 

개자추도 처음부터 면산으로 들어 갈 생각은 아니었다. 주군(진문공)19년의 망명생활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르는 선상에서 그간 주군을 모시고 다니며 갖은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신하들끼리 논공행상을 미리 점치며 키득거리는 모습에 토악질이 나고 환멸을 느낀 나머지 홀어미를 설득하여 면산으로 숨어든 것이다. 국가와 주군을 위해 할 일을 했을 뿐 정가에 낯짝 내 밀 생각이 전혀 없었든 것이다.

 

이문열 선생이야 말로 참 보수의 가치와 명분을 위해 애쓰시는 분이다. 자신의 부친이625동란을 통해 자진 월북할 정도로 골수 빨//이였고(애비나 가족중에 빨//이였든 놈들 중 빨//이 아닌 놈 있던가?),그 연좌에 걸려 젊은 시절 형언 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지만 궁극엔 이 나라가 보수 세력에 의해 자유민주를 수호하는 국가로 거듭나기 위해 보수의 맨토를 자임했던 것이다. 아귀들이 들끓는 복마전 속으로 학같이 고고한 양반을 저희 잣대로 끌어 들이려는 시도와 음모에 분통이 터져서 해 보는 소리다.

 

20122월 하순의 어느 날.

 

덧붙임,

塞下曲(새하곡)”이라는 중편소설이 있다. 이게 아마 소설가 이문열 선생을 문단에 入籍(입적)시키는 계기가 된, 소위 신춘문예인가 뭔가 하는 그런 소설인 듯 싶다. 40년 전 新東亞(신동아)가 창간되고 얼마 뒤 부록에 엮인 것을 읽은 기억이 있다. 당시 나는 제대를 한지56년 되었으나 당시의 군대가 워낙 强軍(강군)으로 육성된 탓에 그때까지도 軍紀(군기)가 아직 남아있는 상태였는데, 마침塞下曲(새하곡)”을 읽으며 그 생생한 표현에 아직도 군대 안에 머무는 듯 착각을 시종 일으키며 단숨에 읽어 나갔던 그런 소설이다.

 

물론 그 소설 덕분에 이문열 선생의 주가가 세상에 이목을 들어내는 계기가 되었지만, 나 역시 그 소설로 이문열 선생의 왕팬(뭐 그렇다고 그 양반의 집 앞에서 꽥꽥거리는 게 아니고 그 양반이 출간하는 저서는 무조건 샀다.)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오래전의 썰을 새삼 꺼 집어내 전재(轉載)하는 것은 이문열 선생을 교묘하게 비난하는 또 다른 썰을 발견 했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의 글이나 썰에 반대를 절대 때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 썰의 내용이 정말 얄미울 정도로 간교했었다. 각설하고

 

아래의 기사를 찾아 일독을 권한다.

[최보식이 만난 사람] “왜 惡만 드러내는가… 살아간 사람의 성취 없이 이뤄진 세계는 없어

[작가 이문열 단독인터뷰]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2/18/201802180171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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