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고초려의 재해석과 자한당에 보내는 충언(忠言).

사마양저(司馬穰苴)의 기행

중국은 많고 많은 병서(兵書)가 있다. 그중 사마법(司馬法)이라는 병서를 집필한 이가 바로 사마양저다. 본명은 전양저(田穰苴)이고 춘추시대 제나라 출신이다. 몰락한 집안에 가난했기 때문에 생활은 몹시 고달팠다. 그러나 청운의 꿈을 버리지 않고 학문에 용맹정진 했다. 따라서 그의 학문과 병법은 손오병법의 창시자인 손무나 오기만큼 깊었고 제갈량과 비견해도 좋았지만 알아주는 이가 없었다. 당분간 땅이나 파고 흙이나 일구는 촌부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기적 같은 기회가 왔다. ()나라 경공이 그를 대장군에 임명한 것이다. 그리고 제나라를 침략해 온 외적을 막기 위해 출전하라는 명을 받았다. 막상 출전을 하려드니 시골의 농사짓던 촌부의 신분에서 갑자기 대장군이 된 사람이라 군사들이 자기의 명령을 듣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를 대고, 경공이 신임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을 군감(軍監)으로 붙여 주면 군사들을 지휘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제경공은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자기가 총애하는 공족 출신의 장가(庄賈)라는 인물을 군감으로 임명하여 사마양저를 따라 종군하도록 명령했다. 사마양저와 장가 두 사람은 상면을 하고 다음 날 일정한 시각에 군영에서 만나서 같이 출전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이윽고 다음 날 약속 시간이 되었으나 장가는 집안에서 마련해 준 전별연에서 마신 술 때문에 약속시간에 나올 수 없었다. 사마양저는 장가가 경공이 총애하는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군법에 따라 처형했다. 군주가 총애하는 공족출신의 귀족을 처형함으로 해서 군법의 엄숙함을 밝혀 제나라 군대의 기강을 잡고 그 지휘권을 완전히 장악한 것이다.

 

안영(晏嬰)이라는 인물

나는 가끔 이곳에안영이라는 필명을 쓰시는 안영 선배를 볼 때마다 이 사람이 생각난다. 안영을 안자(晏子)라고 한다. 자는 평중(平仲)이며 춘추시대 제나라 이유(지금의 산동성 밀현) 출신으로 제나라가 배출한 걸출한 재상의 한 사람으로 무려 57년 동안 제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했다. 현금에 이르러 5000년 중국을 이끌어온 50인의 책략가에도 오른 인물이었으며 공자보다 한 세대 전에 활약한 사람이다. 사마천의 사기 관안열전(管晏傳)에 사마천은 안자가 타고 다니는 수레의 말고삐를 잡아 봤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라고 할 정도로 존경한 사람이다. 제경공은 언제나 춘추의 패자였던 제환공처럼 되기를 원했고 그래서 많은 인재들을 불러 모았다. 그런 제경공의 마음을 잘 읽은 안영은 위의 사마양저(司馬穰苴)를 제경공에게 천거하여 군사로 모시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희망이 훗날 이루어지고 결국 사마양저는 제나라의 군사가가 된 것이다.

 

이도살삼사(二桃三殺士)

당시 제나라엔 역발산기개세(拔山氣蓋世)를 가진 세 사람의 장수가 있었다. 고야자, 공손첩, 전개강이라고 했다. 이 자들은 저들의 힘과 무용만 믿고 안하무인이었다. 안영은 사마양저(司馬穰苴)를 군사로 모시고 싶었으나 이 세 놈 때문에 그를 천거할 수가 없었다. 그러든 어느 날 노나라와의 외교상 열린 연회장에서 안자는 두 나라 군주와 그 재상들이 남긴 천도복숭아 두 개로 평상시에 갖고 있던 세 사람 간의 경쟁심을 교묘하게 유발시켜 모두 자살로 몰고 갔던 것이다. 그리고 세 사람이 죽자 안자는 곧바로 시골에 은거하며 농사를 짓고 살던 사마양저를 불러와 제경공에게 천거하여 제나라의 국방을 맡겼던 것이다.

 

 

양보음(父吟)이라는 노래

보출제동문(步出齊東門):제나라 임치성 동문 밖으로 걸어 나서면

요망탕음리(遙望湯陰里):탕음리가 저만치 보이는데

이중유삼분(里中有三墳):그곳에는 무덤이 세 개가 있다

누누정상사(累累正相似):모두가 같은 모습으로 나란히 늘어져 있다.

문시수가총(問是誰家冢):지나가던 사람이 누구의 무덤이냐고 묻자

전개고야자(田開古冶子):전개강, 고야자, 공손첩, 삼걸(三傑)의 무덤이로다.

력능배남산(力能排南山):힘은 남산을 등에 업을 수 있었고

문능절지기(文能絶地紀):지략은 능히 지기를 끊어 놓을 만 했는데

일조중음모(一朝中陰謀):하루아침에 음모에 떨어져

이도살삼사(二桃殺三士):복숭아 두 개로 세 사람의 장사가 죽음을 당했다

수능위차자(誰能爲此者):누가 능히 세 장사를 이렇게 죽일 수 있었는가?

상국제안자(相國齊晏子):제나라의 상국 안자(晏子) 이었더라!

 

제갈량은 양보음을 노래 부르다

양양성(襄陽城) 근교의 융중()에 은거하고 있는 제갈량을 찾아 나섰지만 두 번은 부재중이었고 마지막 세 번째 만난 것이 이른바 삼고초려다. 삼고초려를 할 때 유비의 의형제들 관우와 장비는 불만이 컸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서생을 세 번씩이나 엄동설한에 찾는 것도 그렇고 의형제인 자신들보다 깍듯이 대하는 것도 그렇고 특히는 아들 뻘 되는 사람에게 지나치게 공대 하는 것도 그랬기에 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유비가 세 번째 제갈량의 초옥을 찾았을 때 그는 유비의 일행을 못 본 것처럼 한 자락의 노래를 한다. 이른바 위에 있는 양보음(父吟)이라는 것이다. , 유비가 자신의 심중을 알아 달라는 의미의 노래다.

 

삼고초려는 유비의 구인(求人)이 아닌 제갈량의 구직(求職)이력서

사실 제갈량은 이런저런 인편에 유비의 곤고(困苦)한 입장을 알고 있었고 언젠가는 유비가 자신을 찾아 올 것을 미리 예견 하고 있었다. 그의 절친 사마덕조나 서서가 유비에게 제갈량을 소개할 때부터 그런 조짐은 보였던 것이다. 아니한 말로 출사할 마음이 티끌만큼도 없는 사람을 일부러 소개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서서 같은 이는 제갈량 버금가는 책사이지만 조조의 간계에 의해 유비의 책사가 될 수없는 입장이었고, 사마덕조는 처음부터 정치 따윈 염두에 두지 않은 숨은 선비였다. 하여 존경하는 유비에게 자신들을 대신하여 제갈량을 소개 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비에겐 이미 생사를 같이하기로 한 의형제 관우와 장비가 있었다. 이는 곧 사마양저에게 전개강, 고야자, 공손첩과 같은 씨도 안 먹힐 장사들이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 세 사람이 있는 한 아무리 좋은 방략이나 책략도 먹혀들지 않고 소용이 없는 것이다. 제갈량은 도원결의(桃園結義)를 할 당시 한 날 한 시에 죽기를 맹세한 한 유. . 장 세 사람의 맹세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제갈공명이 위의 양보음을 통해서 유비에게 말하려고 했던 것은 자기를 불러서 천하를 경영할 생각이 있다면 당신과 함께 20여 년간을 싸움터를 누비고 다니며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당신 의형제에 대한 조치를 먼저 해야 할 것이 아니냐는 신호였던 것이다. 사마양저가 왕이 총애하는 장가(庄賈)를 군법에 회부하여 죽이듯 할 수는 없어도 관우와 장비를 자신의 명령을 받들 수 있도록 조치하라는 의미의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즉 임용권자인 유비에게 새로 등용한 사람이 마음 놓고 자기의 뜻한 바를 펼칠 수 있도록 20여 년 동안 데리고 다녔던 가신이나 생사고락을 같이 해 온 부하들을 단속함으로서 자기가 뜻을 펼칠 수 있도록 사전준비를 해주기를 요청하고, 만일 자기가 등용되면 유비의 뜻에 반하더라도 사마양저처럼 주어진 직분에 충실하여 비록 유비가 사랑하는 그 누구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의사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양보음이라는 이력서를 통해 삼고초려를 하게 했으니 유비의 구인(求人)이 아니라 제갈공명의 구직(求職)인 것이다. 장황한 썰이지만,,,,

 

 

덧붙임, 잘 좀 읽고 음미하여 삼고초려(三顧草廬)도 모자라면 팔고초려(八顧草廬)라도 해서 당을 구할 새로운 인물을 찾아나서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 친이. 친박하며 대가리 깨지게 싸우는 개子息들을 보면 내가 무슨 영광을 얻겠다고 저런 개子息들 편에서 뭉가와 개만도 못한 그 패당에게 저주를 내리며 패악적 개gr을 떠는지….아유~! 참…천등산 박달재가 무너지도록 목 놓아 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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