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한국당에 보내는 충언(忠言) (2부)

제가 원래삼국지12년에 한 번씩은 읽는데 근년 들어 인타발이 좀 길어45년 만에 다시 읽습니다. 마침 독서의 계절이라 가볍게, 하도 읽어서 너덜거리는월탄 선생님의 삼국지를 어제부터 읽어 내려가는 중입니다. 그런 가운데 삼국지에서 빼 놓을 수없는원소(袁紹)’라는 인물이 등장하고 활약하는 대목에서 문득 느끼는바가 있어 한하려는 것입니다. ‘하기 전, 우선 심혈을 기우려 조사한원소를 비롯한 등장인물의 약력()을 먼저 소개하겠습니다.

 

원소(袁紹)

()는 본초(本初)이며 여양(汝陽:하남성 상수)사람으로 사세삼공(四世三公), 누대를 내려오며 정승을 배출한 지체 높은, 삼국지에 등장하는 어떤 인물보다 명문집안 출신이다. 처음 사례교위를 지내면서 여러 차례 대장군 하진에게 환관을 주살하라고 권했으나 오히려 하진이 환관들에게 죽임을 당하자 그는 힘을 다하여 십상시 반란을 진압하였다. 동탁이 등장하여 권력을 농단. 전횡하면서 황제를 폐하려 하자, 그는 반대하고 낙양으로 피하여 발해태수를 맡았다.

서기190(단기2523년 중국漢헌제 초평 원년, 신라벌휴왕6, 고구려고국천왕11, 백제초고왕24)동탁의 농권을 막고 황제를 보위하기 위해17路軍의 근왕병을 일으켰을 때 맹주(盟主)에 추대되기도 했었다. 후에 기주(冀州)를 탈취하여 본거지로 삼고 공손찬을 격멸 하였으며 청주(靑州). 유주(幽州). 병주(幷州)등 네 주()를 점령하여 최대의 할거세력으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사람 됨됨이 외견상으로는 관대하였으나 속마음은 옹졸하여 시기와 질투가 많고 계책은 잘 세우나 결단성이 부족하여 여러 차례 실기를 한다. 결국 조조와 관도대전 한 판 싸움에 패하여 세력이 크게 약해지며 서기202(단기2535, 漢헌제 건안7, 신라 내해왕7, 고구려 산상왕6, 백제 초고왕37)병들어 죽는다.

 

저수(沮授)

광평(廣平: 하북성 계택)사람이다. 일찍이 원소에게 황제인 헌제를 맞이하여 여업(:하북성 임장)땅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권했으나, 그 계책을 따르지 않아 조조에게 빼앗겼다. 원소가 조조와 일전을 위해 여양(汝陽)으로 진군할 때 그는 가산을 다 털어 원소를 따라 출정하였고, 관도대전(官渡大戰)때에는 여러 차례 원소에게 계책을 주며 간했으나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감옥에 갇히기 까지 한다. 원소가 크게 패 한 후 조조의 포로가 되었으나 조조는 그의 재주를 깊이 사 진하게 예우를 해 주었으나 완강하게 거부하며 말을 훔쳐 원소에게 돌아가려다 잡혀 죽음을 당했다. 그 해가 서기200(단기2533, 중국漢 헌제 건안5, 신라 내해왕5, 고구려 산상왕4, 백제 초고왕35)이다.

 

전풍(田豊)

()가 원호(元皓)이며 거록(巨鹿:하북성 거록)사람으로 지혜가 풍부하고 육도삼략에 능통하여 저수와 함께 원소 수하에서 이름을 나란히 하였다. 일찍이 원소에게 조조가 유비를 치는 기회를 이용하여 군사를 일으켜 허도(許都:조조의 아지트)를 공격하자고 건의하였는데 원소는 막내아들이 옴을 앓아 마음과 정신이 어지러워 그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여양(汝陽)으로 진군할 때, 조조의 군사가 강성하니 가볍게 대적할 수 없다고 간하며 말리다가 하옥되었다. 원소가 관도대전(官渡大戰)에서 대패한 후 그를 볼 면목이 없게 되었을 때 한솥밥 먹던 같은 모사 봉기(逢紀)가 참소(讒訴)하여 그를 죽였다. 역시 그 해가 서기200년이다.

 

봉기(逢紀)

()는 원도(元圖)이며 원소를 위하여 많은 계책을 내 놓은 인물이다. 일찍이 기주목(冀州牧) 한복을 협박하여 원소에게 기주성을 바치도록 계책을 세워 원소의 아지트를 굳건하게 하였다. 역시 원소가 여양을 진격할 때 그와 심배(審配)를 군사로 삼았다. 원소가 관도에서 패한 후 그는 전풍을 만나기가 치욕스러워할 때 참언을 하여 전풍을 죽이게 했다. 원소가 죽고, 그의 아들인 원담과 원상이 권력다툼을 벌이자 그와 심배는 원상을 받들어 원소의 자리를 잇게 하였다. 조조가 기주성(冀州城)을 공격하자 원상은 그에게 명하여 원담과 함께 따라 나가 싸우게 하였으나 원담이 패하며 그에게 명하여 편지를 가지고 원상에게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원상은 군사를 보내지 않자 원담이 노하여 그를 참수하였다. 서기202

 

심배(審配)

()는 정남(正南)이며 위군(魏郡:하북성 임장)사람이다. 원소가 조조를 토벌하려 하자 그와 곽도(郭圖)가 적극 찬성하였다. 원소가 여양으로 진격할 때 그와 봉기가 군사(軍師)로 뽑힐 만큼 계략이 많고 출중했다. 원소가 죽은 후 그는 봉기와 원상을 받들어 원소의 뒤를 계승하고 원상을 도와 원담을 공격하였고, 조조가 원상을 공격해 오자 원상은 그에게 업성(鄴城)을 지키라고 명하였으나 그의 조카 심영()이 성문을 열고 조조에게 항복하였지만 그는 죽기로 싸웠으나 조조의 장수 서황(徐皇)에게 사로잡히고, 조조는 그에게 예우를 해주며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저수(沮授)처럼 완강히 거부하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그해가 서기204(단기2537, 중국 漢헌제 건안9, 신라 내해왕9, 고구려 산상왕8, 백제 초고왕39)이다.

 

허유(許攸)

()는 자원(子遠)이며 남양(南陽: 하남성 남양, 제갈공명의 고향)사람이며, 어려서부터 조조와는 친구였고 동문수학하였다. 원소가 모사(謀士)인 봉기(逢紀)의 계책으로 기주를 탈취하여 근거지로 삼아 위에 열거한 저수. 전풍. 봉기. 심배등과 함께 기주의 일을 나누어 관장하게 하였다. 크고 작은 싸움에서 기지를 발휘하여 원소에게 계책을 주었고, 관도대전에서 그는 군사를 나누어 조조의 아지트인 허도(許都)를 공격하여 양쪽에서 협공할 것을 건의 하였으나 받아 들여 지기는커녕 오히려 크게 빈축을 산다. 결국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조조에게 몸을 의탁하여 원소의 식량창고인 오소(烏巢)를 습격하라는 계책을 바치고 조조는 그의 계책에 따라 전승을 거두었다. 조조가 원상을 격파하고 업성(鄴城)을 포위하자 이번엔 수공(水攻)의 계책을 주어 완승을 거두는 활약을 한다. 이런저런 많은 전공을 세운 후 오만해져 뽐내기를 자주하며 조조에게도 예의를 차리지 않다가 하루는 조조의 맹장 허저(許褚)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해가 역시 서기204년이다.

 

곽도(郭圖)

()는 공칙(公則)이며 영천(潁川:하남성 우현)사람이다. 원소와 조조가 관도에서 큰 싸움을 하자, 조조가 허유(許攸)의 계책을 이용하여 원소군의 양식 저장소인 오소(烏巢)를 습격하였다. 원소가 군사를 파견하여 오소를 구하려하자, 그는 조조의 군영을 공격할 것을 간했고, 장합(張郃:후일 조조의 명장이 됨)과 고람(高覽)등이 조조군영을 공격하였으나 그 계책이 실패하자 그는 자신의 과실을 감추기 위해 원소에게 참소를 하여 장합과 고람은 조조에게 항복한다. 원소가 죽은 후 아들 원담. 원상이 권력을 다투자 그는 원담을 도왔다. 뒷날 조조가 원상과 원담을 공격하고 포위를 하자 그는 원담을 따라 포위망을 돌파하다가 조조의 장수 악진이 쏜 화살을 맞고 죽었다. 그해가 서기205(단기2538, 중국 漢헌제 건안10, 신라 내해왕10, 고구려 산상왕9, 백제 초고왕40)이다.

 

한나라당 관계자 여러분!!!여러분께서는 이상 열거한 인물평을 보고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원소를 위시하여 모든 구성원(?)이 일세를 풍미하며 한가락씩 하는 기라성 같은 인물들입니다. 원소에게는 이와 같이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책사(策士)와 모사(謀士)가 즐비했습니다. 개개인의 능력을 본다면 시간적으로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제갈량에 버금가는 원소의브레인들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당()내에서 갈라서 무리와 파당을 지어 서로 반목하고 질시하며 지냈습니다. 저수와 전풍이 한패거리로 또 봉기와 심배가 한 무리가 되어 서로를 깔아뭉개다 심지어 적군인 조조에게로 전향까지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들 모사들의 개인 성향이나 능력보다 이런 훌륭한 브레인을 통합 시키지 못하고 그저 그런 뱃사공으로 전락시켜 배가 산으로 오르게 한원소의 됨됨이가 원소 스스로를 망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위에 적시한 대로 원소는 외견상으로는 관대하였으나 속마음은 옹졸하여 시기와 질투가 많고 계책은 잘 세우나 결단성이 부족하여, 한마디로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임으로서 천하를 쟁패할 조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실기를 하며 스스로 자멸하고 맙니다.

 

저는 이 대목에 이르러 오늘날한나라당을 보는 것 같습니다. ‘명빠박빠니 패거리를 나누어 서로 지지고 볶아대는 모습과 과정이 흡사하며 무엇보다도 소위 당을 운영해 나가는 지도층이 결단력 없이 우유부단한 모습에 당의 진로가 불명확하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거대 여당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마치 원소가 그러하듯 지리멸렬할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듭니다. 한나라당에 인재가 많아서 그런 겁니까? 아니면 사공이 많아 그런 겁니까? 오늘아침 어떤 신문을 보니 한나라당의 지지도가 아직은34%대로 절대 우위를 점하고 있지만, 반면 어느 정당도지지 않는 국민이38%가 넘는 답니다. 향후4년여 국정을 선도해야 할 거대 여당 한나라당의 앞날이 무척 걱정스럽고 염려되는 아침입니다. 그러나 이런 저의 걱정과 염려가 기우이기를 간절히 바라는 아침이기도합니다.

 

20089월 하순 어느 날 씀

 

 

덧붙임,

자유한국당 소속 국회의원 및 당원 그리고 관계자 여러분!!!!10년 전의 얘깁니다. 저는 이 말을 자주 인용합니다마는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라는오늘날 보수의 궤멸을 가져온 당신들이 어떤 행동을 하고 있습니까? 이 아침 10년 전 불길한 예감을 했던 그날의 일들을 반추해 보았습니다. 어떤 말이 필요할까요? 어떤 욕지거리와 곰삭은 가래침을 당신들 면전에 뿌릴까요? 나라와 국민의 안위는 수수방관(袖手傍觀), 오불관언(吾不關焉) 각자의 밥그릇 지키기에만 열중하시는 개만도 못한 개子息 여러분!! 이 아침 거시기 잡고 물구나무서서 단 몇 분이라도 반성하는 시간을 가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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