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들이 왜 그리 궁금한데???

(상략)사고의 정황을 돌이켜보면 그런 기적이 또 있을까? 할 정도다. 보통은 말하기 쉬워불행 중 다행이라는 표현을 쓰긴 한다. 그러나 몇몇의 부상자와 중국소녀(학생) 세 사람의 안타까운 희생이 따르긴 했지만, 그렇게 끔찍한 대형 사고임에도 그 정도의 희생을 두고불행 중 다행이라는 표현을 쓰긴 미진하다. 사고 후 나는, 이것은 국가와 국민의 그리고 아시아나 그룹의 홍복이고 기적이라는 표현을 거리낌 없이 했었다. 달리 표현할 적당한 단어를 찾기가 쉽지 않을 만큼 그것은 기적이었고, 그런 기적 속에 우리 가족만의 또 다른 기적이 있었기에 그 얘기 하고 싶은 것이다.

 

보따리장사 차 해외를 자주 다니며 늘 상냥하고 친절한 승무원들의 모습에 반해저런 며느리(승무원)가 있었으면…’했었는데, 나의 바람이 하늘에 통했는지 정말 승무원 며느리를 얻게 되었다.(내 바람을 알고 아들놈이 의도적으로 승무원인 며느리를 낚은 게 아니고 고교 때부터 알고 지내다 성인이 되어 우연히 만났다는, 그러나 아비가 승무원 며느리를 바랬다는 사실을 모른 채 연애를 했다는거짓말 같은 사실.)

 

며느리를 얻기 전까지도 나와 아내는 최상급은 아니지만대한항공(모닝 캄), 아시아나 다이아몬드카드(마일리지)’를 받을 만큼 여행의 빈도가 많았다. 그 후 며느리가 다니는 아시아나 항공의 단골이었고, 며느리가 된 후에도 승무원들의 친계 가족들에게 주어지는 혜택(공짜표)을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해서 한 동안은 공짜표를 이용하지 않았을 뿐더러 아들놈에게도 가급적 며느리의 지위(?)를 이용한 공짜 혜택을 즐겨 하지 말라고 충고를 주었던 터다.

 

사고가 났던 날도 그랬다. 꼭두새벽 신문기사 검색을 하다가 사고<속보>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 아들놈에게 급하게 전화를 걸어네 처가 탄 비행기가 사고가 났으니 빨리 전말을 알아보라!’며 독촉을 하자,“아버지! 저 지금 샌프란시스코에요!”하기에 더 놀라서얌마! 니가 왜 거기에 있어!?”라고 소리를 쳤던 것이다. 즉 공짜표 이용하는 걸 싫어하고 잔소리 하는 아비에게는 말도 않고 제 어미에게만 보고하고 제 처와 동행을 했기 때문이다. 당시 아비의 호통소리와 함께그래! xx(며느리)이는,,,?”이라는, 불안. 초조가 동반된 거친 물음에 주눅이 들어 무조건괜찮아요! 너무 걱정 마세요!”라는 대답에 정말 괜찮은 줄 알고 크게 안도하며 그 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사고 후 금방 돌아올 것 같았던 아들내외의 귀국이 자꾸 연기된다. 사고기의 다른 승무원들은 현지에서 며칠간의 치료를 마친 후 속속 귀국하여 국내 병원에서 가족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는데….‘괜찮으니 걱정 마세요!’라는 말이 우리와 처가 식구를 안심시키기 위한 립 서비스였단 말인가? 결국 그것을 이기지 못한 친정아버지(사돈)와 며느리의 큰언니가 샌프란시스코 현지로 갔다.

 

문제는 불안과 궁금증을 못 이겨 현지로 날아간 사돈과 언니마저도 함흥차사(?)가 되신 게다. 길어야 34일이라고 말씀 하시더니 일주일이 넘었던가? 귀국일자를 피일차일 미루는 사이 모종의 해프닝이 벌어지고 그예 뚜껑이 열려버린 마누라의 현황을 그린마누라가 뿔났다라는 썰을 이곳에 올리기까지 했던 것이다.(그 당시의 현황이 궁금하신 분은 500원은 필요 없고 직접 찾아 읽으시기를…)

 

이런저런 사연을 안고 드디어 며느리와 아들이 귀국을 했지만 그리운 가족 품으로 바로 온 것이 아니라 공항에서 곧장 병원으로 후송을 시키는 것이었다. 이곳 농사철이 아무리 바쁘기로 며느리와 아들이 기적의 생환을 했다는데 어찌 아니 갈 볼 수 있겠는가. 시간을 맞추어 병원으로 갔고 그리고 병실 문을 들어서는 순간 며느리의 모습이 섬뜩할 정도로 참담(?)한 모습…(하략)

 

BY ss8000 ON 8. 26, 2013 (며느리의 귀환 1부에서 발췌)

 

 

덧붙임,

●아시아나 항공 보잉 777 OZ 214편이 인천공항에서 승객 291명과 승무원 16명을 태우고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에 착륙 도중 추락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꼭 5년 전인 201377일 오늘이었다.

 

●난 사실 고소공포증이 있다. 그럼에도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수백 차례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쏘아 돌아다니던 보따리장사치 였고, 어쩌다 대형 비행기 사고라도 나면 내가 당한 것처럼 오금이 저릴 정도로 겁을 냈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방법이 없었다. 어쨌든 그 사고가 나기 전부터 며느리에게 은근히 그만두기를 종용하곤 하던 중 그 사고를 당한 것이다.

 

●며느리는 지금도 통원치료를 하고 있다. 물론 회사의 배려로 기본급도 나오고 크게 능력은 없어도 아들놈이 제 밥벌이는 하기에 생활하는데 불편함은 없다. 그래도 자칫 목숨을 잃을 뻔(특히 며느리는 다른 승무원과는 달리 더 위중 했었다)한 보상을 받기 위해 아시아나가 아닌 미국 현지에서 보잉사와 투쟁을 했다.(며느리의 부상은 조종사의 과실이 아닌 기체결함으로 판명 났었다.)

 

●미국은 우리와 달리 변호사의 수임료를 먼저 지불하지 않고 모든 경비를 변호사가 소비 내지 지출하고 승소한 금액의 30%를 떼 간단다. 그렇게 4년여를 씨름한 끝에 지난 연말 보상을 받았단다.(그리고 작년 말을 기해 퇴직을 했다.)

 

●마누라고 제 누나들과 매형이고 그 것에 대해선 절대 묻지도 따지지도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 죽다 살아난 대가로 받은 금액을 알아서 뭣할 것이며 안다고 하여 또 어쩔 것인가? 그런데 가끔 아들놈에게 친구나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오는 모양이다. “얼마 받았냐?”. , 이상한 사람들이다. 나도 모르는 걸, 지들이 왜 그리 궁금한데???(근데 솔직하게….나도 궁금하다. ㅋㅋㅋㅋ…..)

 

●요즘 국적기 양사가 이래저래 곤욕을 치루고 있기에 갑자기 생각나 한 썰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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