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 이야기.

식성이 많이 까다로운 편이다. 안 먹 는다 보다 못 먹는 게 많다. 특히 일반적으로 알려진 강정제(개고기, 장어를 포함한 일반 생선 및 젓갈류, 기타 남자들에게 좋다는 이런저런 보양식 등등). 그러나 대신 완벽한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나물 종류면 무조건 ok다. 그래서 마누라와 40년 이상을 살아도 음식에 관한 지청구나 타박을 받지 않고 살고 있고, 이나마 은퇴 후 산골에서 노후를 보낼 수 있을 만큼 생활비 절약에 일조 했다.

 

나는 지금도 생선회는 먹지만 생선 구이나 졸임은 안 먹는다. 특히 날 오징어는 나이 70이 넘었어도 술안주로 즐기지만 오징어 볶음이 식탁 위에 올라오면 그 밥상 날아간다. 악취의 기억 때문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 그랬다. 죽음이란 개념이 확실치 않았던 것 같다. 염을 해 놓은 할머니의 시신 머리맡에서 숙제를 한다고 깝죽였으니 그 모습을 본 아버지로부터 불이 나고 별이 튀길 만큼의 귀 쌈을 얻어맞았으니까. 만약 그날 할머니의 죽음이 아니고 아버지나 어머니였더라면 좀 달랐을까?

 

아무튼 상머슴 둘을 두고 농사를 지었으니 보리밥 세 끼는 굶지 않을 만큼 중농이었던 것 같았다. 대신 병마에 시달리지는 않았지만 아버지는 워낙 약골이시라 호미 하나 안 들고(근동에서 알아 주는 한학자에 공무원)그 몫을 할아버지가 하셨다.

 

아버지는 역시 근동에서 알아주는 정말 효자이셨다. 3년 시묘는 안 했지만 안방에 상석(牀石)을 차려 놓고 조석으로 제를 올린 후에 우리들 식사를 하게 했고, 없는 살림에 삭망(음력 초하룻날과 보름)때에는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곡(哭)과 제(祭)를 올렸고 환도 후 서울에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할머니 때와 같이 하셨는데 특히 곡(哭)을 하실 때 나는 이웃에 들릴까 조바심까지 내곤 했었다.

 

아이고! 썰이 한참을 빚나갔다.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로 다시 돌아가야겠다. 밥 굶은 기억은 없지만 월사금 못내 수업 도중에 쫓겨나고 때론 그 감정이 증폭되어 다른 아이 같으면 눈감아 줄 일도 중인환시(衆人環視)리에 손바닥을 맞거나 울 아버지처럼 귀 쌈을 맞곤 했다. 즉 많이 가난했던 시절이었다.(그런데 알고 보면 50년 대 이런 추억 가진 분들이 의외로 많더만…부연하건대 그 후 박정희 장군의 군사혁명 이후 우리 집 살림이 폈으니 그분의 은혜를 죽어도 못 잊는다.)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당시 민가로는 황당무계(荒唐無稽)한, 할아버지와 집안의 반대를 잠재우고 5일장(葬: 시골 장터 말고…)을 치루셨다. 그게 예에 맞는지 아닌지는 둘째고 할머니 장례식 치르고, 산 아래 서작골(지명)의 땅뙈기 두세 마지기와 기르던 황소와 돼지 두 마리가 팔려나갔던 것으로 기억 된다. 이를테면 아버지의 효심에서 비롯된 허례허식(虛禮虛飾)에 집구석이…이런 걸 풍비박산(風飛雹散)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난 그런 것 관심을 두거나 둘 나이는 아니었다.(훗날을 회상해 본 이야기다.)

 

할머니 돌아가신 때가 음력으로 동짓달 초팔일(요거 정확함 오늘날 조상님의 모든 제사를 우리부부가 관장하고 있으니까. 혹시 실수가 있을까 싶어 년 초에 새 달력 받으면 동그라미 치고 메모한 거 방금 확인했음). 말 그대로 엄동설한(嚴冬雪寒)계절이다. 방구들이 달아오르도록 불을 때고 음식을 만들고, 상여가 나가기 전까지 불을 땠으니…아랫목 병풍 뒤에 모셔 놓은 할머니의 주검(그 땐 장례식장 같은 거 없었다.)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기 시작한 것은 이틀째인지 사흘째인지???(지금 생각해 보면 3일장이 그래서 생긴 게 아닐까?) 암튼 더 이상의 것을 썰 풀면 비위 약하고 심장 약한 분은 이후 내 썰을 읽지 않을 것 같아 생략.

 

할머니 장례식을 치룬 후 어느 날 어머니가 벤또(일본말을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당시는 그렇게 했으니..)를 싸 주셨는데, 점심시간 벤또 뚜껑을 여는 순간(뜨거운 밥과 혼합된 냄새와 밥으로 번진 약간의 국물), 난 그만 그 자리에서 구역질을 함과 동시 뚜껑을 닫아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날 점심 도시락 반찬이 오징어 채 볶음이었다. 이런 얘기는 이쯤에서 끝내자. 살인의 추억이라는 영화도 있었지만, 냄새의 추억은 없겠나? (난 그날 점심때의 얘기를 하고 절대 오징어 채 볶음은 도시락 반찬으로 싸지 말아달라고 어머니께 특별주문 했었다. 결혼 후 이런 얘기를 마누라에게 할 수 없었으니 밥상이 날아가고…까닭을 알 수 없는 마누라의 호소에 결국 나중에 이실직고했다.)

 

나아~참….뇌물 먹고 소화불량에 걸려 채기 내리겠다고 뛰어 내려 죽은 사람을 기리고 또 기려 나중에는 뇌물 먹고 소화불량에 걸리면 뛰어내리라고‘이정표’까지 만드는 놈이 있으니, 그런 자를 5일장을 그것도 국회장을? 도대체 이런 꼬락서니는 무엇이며 이런 씨츄에이션은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4천만 원 뇌물 처먹고 죽은 귀신에게 5일장에 국회장이면 4천만 원 이상 처먹고 죽은 놈은 국장(國葬)으로 치러야 하나? 아~! 그래! 국장 치룬 선례가 있긴 하다. 또 다른 노씨.

 

다 좋아! 국회장 아니라 국장을 치루든 5일장을 치루든…. 4천만 원정도 도둑질이나 강도질 하다가 돌아가신 양반들은 사회장(社會葬)으로 치룬다고 국회에서 시비 걸겠어? 정부에서 시비 걸겠어? 아니면 사법부 나아가 헌재에서 시비 걸겠어?

 

그러나 이 건 좀 알아야 돼! 뇌물소화불량증으로 돌아가신 양반 이틀 후에 우리의 정미홍 아나운서의 부음을 들었다. 뇌물소화불량증으로 죽은 놈 장례식장엔 대가리 디민 소위 보수하고도 국개 새끼들은 있어도 저희들 편(?)에 서서 문재인과 그 패거리들에게 대항한 애국 여전사의 죽음 앞엔 쥐새끼 한 마리 나타났던가? 정말 할 말이 많지만 이만 총총.

 

결론:

보수는 절대 빨갱이를 이길 수 없다. 당신이 보수라고 자처 한다면 우리 모두 가족. 친지가 탈 수 있을 정도의 일엽편주 하나씩 준비해 두자. 어차피 지리멸렬(支離滅裂)할 보수다.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